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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Feb 12. 2023

둥지 같은 안락함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내 방 책상 여행기 ③ ‘입주자 카드’




어느 날 우편함을 보니 집집마다 ‘입주자 카드’라고 쓰인 종이가 꽂혀 있었다. 일단 우리 집 우편함에 있어 가지고 올라왔지만 신경을 쓰지 않고 책상 책 더미 위에 올려 두었다. 작년 8월에 이사를 와서 차량 등록을 할 때 관리사무소에 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그 주 주말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 아파트 차량 등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전반적인 조사를 통해 앞으로는 꼼꼼히 관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동, 호수를 쓰고 몇 평형인지 썼다. 입주일과 세대주 인적 사항을 적고 차량 현황에도 내용을 채워 넣었다. 입주 형태를 묻는 곳에는 ‘자가’에 표시를 했다. 가족 현황을 쓰고 입주자 카드 정보이용 동의서에 사인을 마치니 적어야 할 내용이 끝이 났다. 빈칸을 쓰며 우리가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우리는 작년에 집값이 최고점을 찍을 때 이 집을 사서 들어왔다. 3년 정도 이사에 뜻이 있었는데 하필 우리가 살던 집이 딱 그 시점에 팔렸다.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살던 빌라 역시 최고가에 팔고 나온 셈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다시 큰 빚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는 남편의 어깨가 많이 무거울 텐데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아 너무 고마운 한편,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리고 가끔 정신이 들었을 땐 ‘나 이렇게 걱정 없이 지내도 되나?’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엄마는 빚을 지면 무섭다고 했다. 어떤 날은 무서워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고. 그래서 정말 빨리 갚아버리고 싶어 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빚이 있었을 때는 매일매일이 빚과의 전쟁이었을 거다.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 빨리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시장에서도 여러 번 물건을 집었다 내렸다 했을 거다.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평생 누구한테도 빚을 져 본 적이 없다며 우리가 처음 빚을 내 자가를 마련했을 때도 “빚 아주 무서운 거야”라며 겁을 주셨다. 하지만 주야장천 대출금만 생각하며 살 수 없는 나라는 인간은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운 쪽으로 노선을 정한 것 같다. 빚은 가끔만 생각하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충분히 즐기자(이기적인 년인가? 명랑한 년이었으면 한다)!


우리가 이사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 점점 늘어나는 짐에 파묻혀 사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크면서 옷이며 장난감, 책 등 짐은 점점 늘어나는데 어디 둘 곳이 없었다. 수납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집의 새 주인이 혼자 사는 할머니라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너무 좁은 곳이었으리라. 


지금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해 3배는 넓다. 거실에서 세 가족이 둥글게 둥글게도 할 수 있고, 안방에서는 우리 가족이 실컷 자고도 공간이 남는다. 무엇보다 내 책상이 생겼고 서재라는 공간도 있다(전에는 책상은커녕 옷 방에 쌀통을 두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썼었다). 단지는 어찌나 조용한지 낮에 창문을 닫고 혼자 있으면 절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편세권이었지만 그 앞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들어야 했고, 심하면 담배 연기를 맡아야 했던 예전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굳이 예전 집과 비교하면서 지금 집의 장점을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만큼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지어진 지 20년이 된 아파트다 보니 단점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살다 보니 단지가 주는 안락함이 있다. 결혼 전 본가 아파트에서는 못 느꼈던 감정이다. 오래된 아파트가 주는 안정감과 안락함이 좋다. 단지에서 까치를 정말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둥지 같은 느낌도 든다. 집 뒤 산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지만 아이는 의외로 올겨울 딱 한 번의 짧은 감기만 앓았을 뿐 나름 건강을 잘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사는 동에서 정문으로 나갈 때 다니는 길. 신축 아파트의 깨끗함은 없지만 세월이 주는 멋과 분위기가 있다. 



결혼 후 처음 살던 집과 그다음 집 모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그래서 떠나왔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와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은행 돈과 남편의 책임감으로 얻은 이 집에서 우리는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이렇게 글로 적고 나니 전보다는 더 애착이 생기는 느낌이다. 


어제 처음으로 이웃을 우리 집에 초대를 해 이 동네와 우리 아파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이사 온 지 만 4년이 넘으니 동네에 정도 생기고 장점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난 아직 반년이 안 지났다. 사계절을 다 겪고 나면 동네를, 이 집을 더 잘 파악하고 즐길 수 있겠지. 겨울은 원래 추운 법이니까! 훌쩍.



(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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