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그렇듯 오늘도 산책을 하고 (도서관과 다이소에 들렀다가) 로컬푸드에 갔다. 여름에 가까워지면서 로컬푸드에 가면 눈이 더 반짝반짝해진다. 이렇게 신선한 게 이 가격이라고? 3, 4월에는 얼갈이배추가 그렇게 많더니 이제는 본격 오이 철인가 보다. 신선하고 저렴한 가격 덕에 오이를 보면 오이소박이나 오이지를 담가야 할 것 같고, 부추를 보면 부추무침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휴대폰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1,600원짜리 대파, 1,200원짜리 로메인상추와 깻잎, 1,500원짜리 3개입 오이 등을 샀다. 오늘 구입한 식재료 중 가장 비싼 투톱은 유정란(13,800원)과 홍국쌀 식빵(5,500원)이다.
아침 8시 반에 집에서 나갔는데 집에 오니 11시다. 허기진 배에 뭐라도 넣어 주고 싶지만 참고 일단 씻었다. 씻고 나와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해 넣고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은 신선한 채소를 많이 먹고 싶었다. 로메인 상추와 방울토마토, 냉장고에 있던 바질잎을 씻어 두고 달걀 세 개로 스크램블을 만들었다. 바질잎과 방울토마토에 올리브오일과 후추, 레몬조각을 넣어 샐러드를 만들고, 로메인 상추는 사선으로 잘라 시저 소스를 뿌려 두었다. 쌀 식빵을 세 조각 자르고 마지막으로 드립 커피를 내리니 오늘 첫 끼 식사 완성.
12시 반이 되어서야 오늘의 첫 끼를 먹었다. 먹기 좋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포크를 든 오른손이 살짝 떨렸다. 식탁 위 여러 개의 접시에 담긴 음식이 모두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귀찮음을 무릎 쓰고 땀 흘려 산책을 하고, 상호대차로 신청해 둔 책을 빌리고, 일주일 넘게 사려고 했던 물품들을 사고, 장까지 봐서 손수(손수, 수제 이런 단어는 특별함을 내세우는 말 같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쓴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만들어 먹은 첫 끼. 정말 먹고 싶었던 걸 내 손으로 차린 노력 덕분인지 오늘은 휴대폰보다 음식에 더 시선이 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음식 색이 정말 알록달록했다. 노오란 달걀스크램블, 연둣빛 로메인 상추, 붉은 방울토마토와 홍국쌀 빵. 선명한 색감과 채소의 신선함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오늘 나의 첫 끼. 선명한 색감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사실은 그동안 나의 오전 시간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왠지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똑같이 아침밥을 차려 먹으면서도 ‘이렇게 하면 뭘 해’라는 마음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시선은 영상에 두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주방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했다. ‘나, 책상 앞에 앉아서 뭐라도 읽고 써야 하는데 이렇게 주방에 오래 있는 건 생산적이지 못한 일이야.’ ‘글 한 편은 고사하고 일기라도 쓴 날이 언제냐.’ 하면서 나를 채근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심스러워했다. 나와 잘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내가 싫어지는 행동을 했던 시간이 꽤 길었다.
정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에서 무언가가 문득 느껴지거나 떠오르는 순간 말이다. 오늘은 식탁 위에 먹기 좋게 차려진 색색의 음식들에게 그런 자극을 받았다. 그런 순간이 오면 사람은 직관적이 된다. 생각의 회로가 샤샤샥 뻗어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나 이런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 나를 위해 밥을 차리고, 내 아이가 맛있게 밥 먹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맞잖아. 주방이 좋으니까 그렇게 늘 있었던 거 아니니?’ 각성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이런 순간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어디에 앉아 무얼 이야기하면 좋을지를 고민할 시간에 일단 지금을 이야기해야 한다. (...) 오늘 떠오른 생각은 오늘 가장 진하다. 이제는 더 이상 당일의 색채를 눈앞에서 잃고 싶지 않다.”
- 임진아, 「오늘이라는 아무 날의 집」,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늘 쓰고 싶어 했고, 쓰고 싶은 주제도 있었고, 생각이 날 때마다 에버노트를 켜 메모를 남겨 놓았다. 내 마음에 드는 한 편의 글과 시리즈를 늘 완성시키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에버노트에는 완성하지 못한 짧은 노트만 쌓여 갔고 내 블로그는 몇 개월 간 멈춰져 있었다. 오늘의 각성을 계기로 한 발 나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나에게 아침을 차려줄 에너지를 모아놓아햐 하니까.” - 위의 책
그럼 나는 하루에 딱 세 가지만 집중하자. 나에게 첫 끼를 차려줄 에너지, 일기 한 편 완성시킬 수 있는 에너지, 아이가 하원할 때 넉넉한 마음으로 맞이해 줄 수 있는 에너지. 첫 번째 리스트를 해내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고, 두 번째 리스트를 해내면 또 다른 에너지가 생기고, 마지막 리스트는 앞의 두 가지 리스트에서 얻은 에너지를 떠올리자(단연 가장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나름 할 만큼 했다’ 정도의 느낌만 들게 하자. 새어나가는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관건이겠다. 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재미를 주기 위해 오늘을 나의 ‘에너지 선포의 날’로 정해 본다. 무겁지 않아야 한다면서 선포까지 하는 나지만 이것이 또 내가 느끼는 재미라면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