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자,아프지 말고
나는 스타트업에서 보낸 8년간 세 번의 번아웃을 경험하였다. 내가 번아웃을 겪지 않을 땐 주변에 함께 일하는 동료와 지인들의 번아웃도 종종 보았다. 그런 스타트업 생활에 지쳐서, 너무 힘이 들어서, 오랫동안 지켜오던 회사와 제품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번아웃이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심한 우울증이나 불안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2010년도에 유행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처럼, “번아웃이 오니까 스타트업이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스타트업에서 지내는 시간들이 녹록지 않고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꼭 아파야 하고 꼭 번아웃이 와야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번아웃이 오지 않아야 오래오래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세 번의 번아웃을 겪고 나서 이해하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아끼는 동료와 지인이 번아웃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 내용을 글로도 꼭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증상을 알아차리고 극복할 수 있길 바란다.
첫 번째 번아웃은 해먹 남녀를 완전 새롭게 리뉴얼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었다. 서비스 기획자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콘텐츠 추천과 상품 구매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제품을 새롭게 기획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 하는 큰 기획에 매일 밤을 새우며 준비했지만, 고객의 경험이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 어떻게 추천을 하고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에 너무 집중해버렸다. 한 달 넘게 매주 대표님과의 미팅에서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고, 나중에는 “한솔님은 기획자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회의를 들어가는 게 두렵고 이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디 갈 데도 없던 터라 무식하게 버텼다. 그 당시에는 이게 번아웃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냥 내가 나약하고 역량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만 했다. 나만 몰랐지만, 주변에선 내가 번아웃이 오고 있다는 걸 느낀 것 같다. 당시에 주변 동료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그나마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EP4. 스타트업에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에서 다루었다.
두 번째 번아웃은 해먹 남녀가 중국에 진출한 후에, 중국에서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겪게 되었다. 당시에 중국에 진출하자마자 싸드가 터져버렸고, 한류와 한국음식에 대한 선호를 기반으로 성장하려던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중국에서 매출을 내기 위해 중국에 있는 한국 회사들에 콘텐츠 마케팅 제안을 하기도 하고, 중국에서 쉽게 못 구하는 유럽 식품이나 가전을 가져와서 팔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유통과 무역도 처음 경험하는 데다가 중국어와 중국시장도 모르다 보니, 일이 잘 돌아갈 턱이 없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버티고,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려고 했으나 한국 본사에서 기대하는 것만큼의 결과를 만들지 못했고, 이에 대한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고,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조금 아프고 힘들다는 인지를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주일 휴가를 받고 제주도 가서 푹 쉬었다. 다행히 쉬고 중국에 돌아온 후에, 중국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경영진이 결정하였다. 그러고 다시 한국에 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번아웃은 마이 데이터와 금융사 API 연동 프로젝트를 맡으며 뱅크 샐러드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단계에서 성장통처럼 겪게 되었다. 당시에 API 연동 프로젝트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팀에 소속된 동료들도 가장 많았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금융사와 직접 API 연동 계약이나 연동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팀이나 내가 예상한 것보다 금융사는 훨씬 더 오래 걸렸고, 이에 회사에서 기대하는 일정이나 성과를 맞추지 못하였다. 1년 동안 몇 건의 계약은 맺었지만, 실제 api 개발에 착수하고 연결까지 완료시킨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인데 이렇게 지지부진한 성과를 만드는 것에 대한 압박과 부담이 굉장히 컸다. 당시에 API 연동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거나 어떻게든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지 못한 점이 굉장히 아쉽다.
번아웃은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의 결과들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조금씩 싹 티 운다. 매일 밤을 새우고, 주말 가리지 않고 일을 하더라도 일이 잘 풀리고 성장한다고 느끼면 번아웃을 겪지 않는다. 근데 아무리 해도 넘지 못할 벽을 마주한 것 같고, 자꾸 뒤에서 왜 그거 하나 못 넘냐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면 그때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번아웃을 겪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처음 하는 일이나 처음 겪는 분야에서 번아웃을 많이 겪게 되는 것 같다. 커리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번아웃을 많이 겪는 것처럼 말이다.
회사의 성장 과정을 통해 내가 회사의 성장과 같은 크기만큼 성장하면 너무나 행복한 일이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회사가 성장하는 것보다 작은 정도의 성장을 이루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회사에 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번아웃이 고개를 든다. 그동안 왜 그렇게 열심히 해왔나 허무한 감정이 생기고, 굳이 성장하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은 종종 “왜 이렇게 열심히 해야 될까요?”, “왜 성장해야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봐도 열심히 자기 일을 해오고, 성장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데, 그런 자신의 모습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열심히 또 즐겁게 내 일을 하고, 성장해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아주 자연스러운 본능인데, 성장을 거부하거나 의문을 갖는다는 건 번아웃의 증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번아웃은 정신적으로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생기는 우울증과 불안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존감도 낮아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허무주의도 생긴다. 내 경우에는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회사에 출근하기 너무 싫어서 연차를 쓸 때 처음으로 번아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해야 될 일과 약속한 일정들을 무시하고, 무엇하나 별로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는 밤에 잠이 잘 안 오거나 잠에서 자주 깨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듯 매일 잠에 들었는데, 번아웃을 겪을 땐 잠에 드는 게 어렵기도 했다. 그리고 잠에 들더라도 새벽에 자꾸 깨고 오래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업무 시간에 피곤하고, 일이 잘 안되면서 다시 자존감이 낮아지는 등 번아웃이 더 심해지는 사이클을 겪기도 했다.
번아웃의 증상이 본인에게 보이고, 너무 많이 지쳤다고 느껴지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한다. 정신의학과나 심리상담을 받아보면 좋다. 의사 선생님께 내가 겪은 감정과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당장 겪고 있는 수면장애, 불안증 등에 도움되는 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다. 병원을 가보라고 하면 대부분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우리가 감기에 걸리거나 발목이 삐끗하면 병원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정신의학과에 가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방치하고,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에서 번아웃을 겪고 있다면, 현재 자신의 상황을 매니저(상사, 대표 등)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현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명확히 이야기하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이야기하면 대부분 도와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휴직을 하거나 장기 휴가를 쓰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우선은 현재 힘든 상황에서 조금 빠져나와서 자신을 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겪는 어려움의 정도를 낮출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번아웃을 여러 번 겪으면서, 번아웃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하면서, 성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이 부상 방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번아웃에 한 번 빠지면 회복하는 데 최소 2~3개월, 오래 거리면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아까운 시간을 회복하는 데만 쓰게 된다.
나는 번아웃 예방을 위해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명상하고,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 모두 중요하다. 내가 체력이 좋아야 정신적으로 힘들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번아웃에 빠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내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정신적으로 이겨낼 힘이 필요하다. 자세한 이야기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나만의 루틴 4가지"에서 다루었다.
번아웃을 겪을 정도라면 충분히 열심히, 또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번아웃이 올 때는 나의 역량을 탓하기보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냈으면 한다. 스스로를 챙길 수 있을 때, 번아웃도 예방하고 오래오래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