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다른 이름, 성장>
스타트업을 선택한 이상 여유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유로운 여가 시간, 안정적 미래 보장을 포기하고 얻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성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장’은 ‘열정’과 비슷한 단어이다. 회사는 성장이라는 진취적인 단어로 신입사원에게 높은 수준의 실력을 요구하곤 한다. 모든 사람이 꼭 성장해야 해야 할까? 아이유가 말했다.
나는 포켓몬이 아니에요! 매년 진화하지 못해요.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인간의 존재의 목적에 꼭 성장해야 하는 의무 따윈 없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들어온 이상, 성장은 불가피하다. 탄탄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대기업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시스템이 부재한 스타트업에서 직원 한 명이 갖는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적으면 5명, 많으면 50명으로 이뤄진 스타트업에서 한 사람의 성장은 곧 그 기업의 성장과 직결된다. 성장을 담보로 투자를 받아야 하는 스타트업에게 개개인의 성장은 기업의 존폐가 달린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성장에 대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스타트업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반면 성장에 대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또한 살아남기 힘들다.
스타트업에선 성장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과 그에 대한 권한을 준다. 나는 입사한 지 한 달 안에 내 프로젝트를 숫자로 입증해야 했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회사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에 외부 클라이언트를 만나 우리의 서비스에 대해 베테랑처럼 설명해야 했다. 미팅 기회는 두 번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탁월한 연기로 첫 미팅을 클로징하면 바로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다.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것과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미션이다. 스테이지마다 언제나 새로운 미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매일의 새로운 미션을 어떻게 해내다 보니 어느새 3개월이 일주일처럼 지나가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전에 일했던 회사의 1년간 업무보다 많은 업무량을 3달간 소화했던 것 같다. 단순 업무량이 많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 업무의 난이도가 높았다. 선배에게 업무 관련 툴을 배울 뿐 어떻게 일을 '잘'할 수 있는 건지는 각자가 가설을 세우고 실행해서 답을 찾아 나가야 했다.(이 부분은 지금도 동일하다) 입사 후 1년간은 일희일비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제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고 프로젝트 성과는 나지 않아 자책도 많이 했다. 성장이라는 신기루를 보고 마냥 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하지만 뒤돌아봤을 때 그 당시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1년 차가 되던 해에 회사가 커지면서 일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literally!) 늘어났다. 스타트업에선 일이 많아도, 경력이 쌓여도 내 일을 도와줄 누군가는 생기지 않는다. 더 효율적으로, 열 사람의 몫을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KPI를 달성하면 더 높은 KPI가 주어졌다. 일이 익숙해지고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은 다행이지만, 일의 양이 너무 많아서 일을 빠르게 쳐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본질적인 고민은 사치였고, 몸과 마음이 피폐했지만 나를 대체해줄 사람이 없기에 슬럼프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10시 퇴근이 칼퇴, 12시가 야근이라는 농담을 하고 살았다. 이 시기에 나는 성장의 정체기에 있었다. 입사 초기의 일 배우는 재미도 없고, 성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반복적인 일상 같았다. ‘내가 스타트업에서 바랬던 성장이 이런 거였나?’라는 생각에 지쳐가고 있었다.
지친 와중에도 나는 성장을 갈구했다.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성장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 삶의 의미를 잃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성장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거창한 자기 계발을 도모했다. 아이비리그 학생들과 영상 과외 서비스인 링글을 한다던지, 스타트업 마케터의 구글 애널리틱스 관련 마케팅 수업을 듣는다던지, 대학생 때는 완독 해본 적 없는 한나 아렌트의 원서를 읽는다던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거창한 목표는 일만으로도 벅찬 내게 자괴감을 자초할 뿐이었다. 달성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접고, 당장 실행 가능한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대개 배움의 열쇠는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명료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
즉, 당신이 늘 하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배움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일하는 마음中
잠시 멈추어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내가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았다. 첫 번째 목표가 ‘야근 사이클에서 벗어나기’였다. 일이 너무 많아서 야근이 불가피하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자잘한 일을 쳐내느라 집중력을 분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글 킵, 노션 등의 툴을 시도했다. 빠르게 쳐야 할 일과 고민해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을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아침에는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명상을 했고, 저녁에는 체력을 키우고자 스쿼트를 50개씩 시작했다. 이 모든 노력은 한꺼번에 진행되지 않았고, 하루하루의 변화가 모여 ‘성장’이라는 단어로 내게 느껴졌다. 실적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수는 없어도 실질적 성장이었기 때문에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었다.
나는 사람을 회사에 비유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2%대인데 산업에 따라 다르지만 한 기업이 5%만 성장하더라도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반면 스타트업은 5% 성장하면 망한다. 적어도 매년 100%는 성장해야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일 년간 100% 성장한다면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 매일 1%씩 성장한다면 어떨까? 1%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숫자다. 나는 어제보다 1% 성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들을 했던 것 같다. 어제보다 10분을 일찍 일어나든, 먹기로 다짐했던 비타민을 먹든, 어제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일보 앞이라도 진보하면 만족하기로 했다. 이게 사실 쉽지 않다. 의식적으로 사는 것 자체가 깨어 있다는 의미이고, 자기 전에 일기에 내가 어제보다 나았던 점 한 가지를 쓰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1보 퇴보하면 2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오늘 운동했다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퇴보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성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1%씩 매일 성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1%씩 성장을 노력하다 보면 1년이 지났을 때 적어도 100% 성장해 있을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성장은 정량적으로 측정이 불가하지 않나.
정리하자면, 성장할 수 있는 회사가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을 선택한 이유는 성장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지만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내가 되는 일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 다만 결국 내가 이런 성장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더해진 건 내가 일하는 곳이 치열한 스타트업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일의 난이도가 평이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느끼는 고민의 깊이가 확실히 적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일에 쌓여 허우적대고 업무 효율화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게 성장한다. 회사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사실 하루 1% 성장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나 자신에게 하루 1%만 성장해도 괜찮아-라고 셀프 위안이 필요하다. 내가 성장했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지금까지 내가 스타트업에서 멘탈을 잡고 살아남은 비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가장 싫었던 날은 사실 내가 가장 잘하고 싶었던 날입니다.
마음처럼 잘 안돼 내가 싫은 것입니다.
미워하지 마세요.
오늘 누구보다 가장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담긴 나의 날들.
-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