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로 백패킹을 떠나요!
태어나서 두 번째 백패킹에 사람들을 이끌어 가게 됐다. 우먼스베이스캠프를 같이 운영하는 명해가 세계 여행 중에 LA에 들리기로 한 거다. 가는 김에 LA 밋업을 열어보자고. 장소는 이미 내 맘속에 정해놓은 곳이 있었다. 바로 '빅 파인 레이크'. 세계 3대 트레일 중에 하나인 존 뮤어 트레일 일부 구간이기도 하고, 정상에는 빙하가 만든 아름다운 호수가 7개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물이 항상 차서 호수 수영을 하기엔 여름인 7-8월이 적기. 게다가 4월 말에 갔었을 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호수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호기롭게 인스타그램에서 제일 아름답게 나온 사진 한 장을 골라 날짜를 적어 포스팅을 올렸다. 산에서 하룻밤 잘 수 있는 ‘overnight permit’도 없었는데 말이다. 미국 국립공원과 국유림들은 자연 보호를 위해 꽤 엄격하게 하는 편이라 백패킹을 하려면 퍼밋이 필수였다. 인기 있는 빅 파인 레이크 트레일은 당연히 이미 오래전에 퍼밋이 동이 났고, 선착순으로 구할 수 있는 워크-인 퍼밋 10장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겐 10장 중 8장이 필요하지만(!!) 왠지 될 것 같았다. 나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항상 함께하니까! 다행히 코로나 때문에 현장 선착순이 아니라 입산 2주 전 오전 7시부터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었다. 수강신청하듯이 초 단위로 연습했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한국인 밖에 없을 거라 자부하며(?)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손가락 체조를 하고 티케팅에 성공을 했다!
대부분 백패킹이 처음인 사람들이라 산에서 2박은 무리겠다 싶어 첫째 날은 등산로 근처의 캠핑장을 잡았다. 원래는 더 밑에 있는 곳이었는데 출발 3일 전에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본 사이트에 우연히 누가 취소한 곳이 나와서 빠르게 장소를 바꿨다. 공간도 더 넓고 가까운 곳으로. 드디어 당일. 밴을 빌리러 일찍 일어나 렌터카 회사에 갔다. 어찌나 떨리고 설레던지. 혹시 뭐라도 잘못돼서 차를 빌리는데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쉽게 키를 건네 받고는 아직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닌데 승리의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됐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 4명이 누워서 자도 넉넉할만한 트렁크 공간이 있는 8인승 밴을 운전한 건 처음이었지만 이내 적응이 됐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온 우주의 좋은 기운이 나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명 ‘하늬투어’가 시작됐다.
차에는 LA에 거주하는 사람들 네 명, 샌디에고에서 온 사람 한 명, 시카고에서 온 사람 한 명, 그리고 한국에서 온 사람이 탔다. 신기하게도 처음 만나는 8명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왜 지금 ‘백패킹’이라는 모험이 필요했는지, 우연히 발견한 포스팅을 보고 한 번에 결정하게 된 이유가 뭐였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몇 번이고 내게 물어봤다. “하늬는 이걸 왜 해?” 밴을 빌리고 왕복 8시간 운전을 직접 하면서까지 사람들을 모아 백패킹 트립을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본 자연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한국에선 보기 힘든 ‘대자연’의 광활함을 더 많은 사람이 느꼈으면 했다. 특히 엘에이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마땅히 기회가 없어서) 못 가는 경우를 줄이고 싶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하늬투어는 수월하게 흘러갔다. 첫째 날 캠핑은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높은 파인 트리, 시냇물, 타는 장작 소리, 그리고 별이 가득한 하늘. 적당한 개인 시간과 그룹이 함께하는 시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드디어 대망의 둘째 날 아침. 상쾌한 새소리를 들으며 기대에 찬 마음으로 깼다. 누룽지와 밑반찬으로 배를 채우니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꼭 필요한 것’을 기준으로 짐을 다시 분류하고 각자의 가방을 비장하게 쌌다. 8명 중 반은 자기 몸 보다 큰 가방을 처음 매보고는 악 소리를 냈다. 4시간을 예상했던 하이킹은 정상까지 9시간이 걸렸다.
10kg 배낭을 메고 걷는다고 공지했지만 그 무게를 직접 매고 걸어보지 않으면 사실 가늠하기 쉽지 않다. 뭐든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일단 시작을 했으니 이제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솔직히 나는 내 속도대로 올라가 빨리 호수에 도착해 놀고 싶었다. 선두 그룹은 이미 저만큼 앞서가 보이지 않은지 오래다. 하지만 가이드는 나였다. 즉, 가장 마지막에 올라오는 멤버를 응원하며 제일 뒤에서 상황을 살피며 가야 하는 사람. 후방 그룹은 걸은 만큼 쉬면서 올라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맞추려고 어떤 때는 재촉도 하고, 너무 힘들어 보이면 저 만큼만 가서 쉬자고 어르기도 했다. 양을 치는 목동이 된 느낌이었다. 내 지인이기도 한, 제일 힘들어 한 멤버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심지어 점점 조여온다고 했다. 속은 계속 메슥거린다고. 본업이 간호사라 온갖 가능한 시나리오를 농담 삼아 말해주는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더라.
풍경을 즐기고 감탄하며 산에 올라 여유롭게 호수 수영을 즐기는 시나리오는 이미 없어졌다. 나의 체력을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때부터는 ‘안전하게 모두가 완주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해발 3,350m가 되는 지점에 1, 2, 3번 호수가 연달아 붙어있는데, 드디어 1번 호수가 보였을 때다. 갑자기 앞쪽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진 선두그룹이 우리를 찾으러 내려온 것이다! 지희와 녀미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 짐을 풀어 사이트를 맡아 놓고 빈손으로 와 에너지가 고갈된 멤버들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도착한 3번 호수 앞. 군데군데 눈이 쌓인 암석 봉우리 밑으로 에메랄드빛 호수가 펼쳐진 풍경은 9시간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멤버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풍경은 내 다리로 이렇게 애를 써서 올라와야지만 볼 수 있는 거잖아. 투어 버스도, 사진만 찍고 이동하는 관광객들도 올 수 없는 곳. 그래서 더 특별하네.”
문제는 저녁을 먹는데 시작됐다. 갑자기 내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한 거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하고 꿀맛인 제육볶음을 먹기 시작했는데 속이 더 안 좋아져서 이내 숟가락을 놓고 텐트로 들어가 누웠다.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느껴졌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마지막 멤버와 하필 텐트 메이트였는데 둘 다 침낭 안에 파묻혀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가이드인데에에!!!!! 어두워진 밖에서는 별 좀 보라고 난리가 났지만 텐트 문의 지퍼를 내릴 힘도 없었다. 긴긴밤을 어떻게 버티나, 아침에도 이 상태면 헬기를 띄워야 하나, 폰도 안 터지는데 119를 부를 수는 있는 건가, 불러도 미국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던데 그래도 불러야 하나, 온갖 대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하는 순간 섬광 같은 순발력으로 텐트 문을 열고 구역질을 세 번이나 연달아 했다. 와. 이렇게 다급하고 강렬한 토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속을 비워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나의 컨디션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지옥 같던 2-3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자연 앞에서 모두가 동등함을 배웠다. 정상에 도착해서도 체력이 남아 자신만만했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올라오는 내내 ‘어떻게 요만큼 걷고 또 쉴 수가 있지?’라는 마음이 들었던 게 한순간에 역전됐다. 이렇게 속이 메슥거린 채로 여기까지 올라와 준 친구를 온전히 공감하지 못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곧바로 사과를 했다.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나도 언제든 아플 수 있는 거다.
푹 자고 일어나니 다들 조금씩 컨디션 회복이 됐다. 선발대는 사실 하행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여유 있게 호숫가에서 아침을 즐기다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모두가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1g이라도 무거운 공동 짐을 자기 배낭에 매달겠다고 서로 뺏기 바빴다.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하산은 수월했다. 4시간 만에 내려온 모두는 어제 이 길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믿기지 않는다며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축하했다. 완주했다는 뿌듯함, 그리고 성취감. 무엇보다 서로 도와 함께 해냈다는 감각이 우리를 새롭게 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돌아오는 밴에서도 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단연코 이틀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각자의 모험담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운전을 하며 역시 자연에서 몸을 맞대며 만나는 것의 묘미가 있음을, 이들의 대화를 흐뭇하게 들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도 만족도 설문에서 ‘장소’에 대한 항목에는 (심지어 나 포함!!) 5점 만점이 나온걸 보고는 우리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멤버들이 적은 백패킹 밋업의 소감 중 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언제부턴가 ‘연대’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만, 저는 사람이 부대끼는 일을 불편해한다고 말해왔었어요. 그런데 등산 중반부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컨디션에만 집중하며 혼자 올라가던 그 시간보다, 등산 후반부 하늬, 지희와 녀미가 후발대를 찾으러 후다닥 내려오던 모습, 명해가 아무 말 없이 몇 발짝 앞에서 걸어가던 뒷모습,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던 녀미와 지희의 모습, 하산하던 날 다같이 느려질지언정 8명이 엇비슷하게 어울려 내려오던 그 광경이 훨씬 행복하게 기억되는 걸 보면, 그게 사람들로부터 받은 연대의 모양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나는 사람과 부대끼는 걸 싫어하지만은 않고, 그 연대를 받기를 (혹은 주기를) 좋아하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걸 이번에 느끼게 됐어요.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사람과 부대끼기 싫어한다고 확고하게 말하지는 않으려고요."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 애썼다. 배낭을 들어주고, 속도를 맞춰주고, 같이 쉬어주고, 물을 나눠 마시고. 자연에서 생존을 위해 함께하며 우리는 중요한 인생의 법칙을 배웠는지 모른다. 오늘의 멀쩡한 내가 내일 갑자기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몸에 새기고, 서로의 필요를 살피며 발을 맞춰 걷는 연습을 하는 것.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배려로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숨 쉬며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