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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희 May 31. 2019

모두, 예술가가 만든다

어떤 멋있음은, 일에 대한 마음에서 나온다

아침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경을 잔뜩 써야 하는 일정이 이어져 피로도가 한껏 높아진 데다 어제는 엄마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생겼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퇴사 고민이 얹어졌는데,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니 해줄 말도 없고 머리만 더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뭐, 다들 좋아서 일하나,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싶기도 했고.

그 컨디션 그대로 활력 없이 움직이던 오늘 아침, 아이가 뭔가를 내밀었다. 진로에 대한 부모의 생각을 적어오라는 것이다. 이걸 왜 이제 주는 거야... 툴툴대며 펜을 잡고 쓰다 보니, 어쩐지 조금씩 기운이 났다.


첫 질문. “부모님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랍니까?”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대략 이런 식의 질문이었다.)

“독립적이고,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적었다. 이미 그런 아이이니, 그렇게 자랄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에는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고 적었다. ‘다들 좋아서 일하나,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했던 어제의 나와는 전혀 딴판의 대답이었다. 아이는 “어떨 땐 그림 그리는 것도 즐겁지 않던데” 하며 웃었다. 너무 뻔하게 좋은 말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건 꽤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이유도 굳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오는 슬럼프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보람을 기약하며 버틸 수 있는 직업이 내 기준에 좋은 직업이다. 지금 내 일을 좋아하는 이유다.


“어떤 직업을 가지길 바랍니까?” 이 질문은 좀 불편했다. 직업은 본인이 정하는 건데 부모에게 왜 물어.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일, 그리고 일을 통해 무언가 배우며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직업.”

아이에게 “엄마 대답이 이 질문의 의도에는 맞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지”라고 하면서도 뭐라고 적었는지 궁금하긴 했나 보다. 가만히 읽어보는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마지막 질문은 “직업에 회의가 올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직업이 영 아닌 것 같으면 다시 구하면 되지 않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나다. 그래서 이렇게 썼다.

“돈이나 일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의사결정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라.”          


일하는 사람들의 책 또는 사람들의 일에 관한 책을 만들다 보니 도대체 일이란 뭔가 하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동료와의 사적인 대화도 먹는 얘기, 날씨 얘기 빼고는 죄다 일의 스탠스에 대한 것들이다.

회사일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 유독 우리가 ‘멋있다’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은 대개 ‘일을 멋있게 하는’ 이들이고, 더 정확하게는 ‘일에 대한 생각이 멋있는’ 이들이다. 그런 분이 책을 내고 싶어 하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가끔 출간목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분은 이런 점이 멋있지’ ‘저분은 이런 생각이 좋지’ 하고 다시 음미하게 된다.

아침에 급하게 적은 대답들은 사실 이 멋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름대로 정리해온 생각들이다. 내 아이들도 일을 대하는 생각이 멋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책장을 둘러보다,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글 한 꼭지를 펼쳤다.           


봄을 코앞에 두고 매장을 오픈하려면 공사는 한겨울에 이루어져야 한다.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따뜻한 온기도 없는 차가운 공간에서 부수고 뚫고 다지고 먼지까지 마셔가며 우리 가게를 만들어준 분들이다.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색온도 3000K의 조명이 탁 켜진다. 히터 바람에도 데워지지 않던 공간은 주방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비로소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손에 익지도 않았고 편안하지도 않은 어색한 공간이지만 그렇게 차차 온기를 찾아간다.
맛있게 식사를 하신 분들은 남은 디테일 작업 내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식사 맛있게 했다고, 고맙다는 말을 해주신다. 음식 하나일 뿐인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지, 내 마음을 이렇게 뿌듯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식당일 하길 잘했다고, 이런 맛에 외식업을 한다며 오픈 내내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예민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여유가 제법 생겼다.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일을 한다.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고, 시간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세상을 조금 따뜻하게 만드는 일을 한다. 우리는 따뜻한 일도씨패밀리다.

-《사장의 마음》, ‘처음 온기가 들어오는 순간’      


         

이 책 첫머리에 나오는 한 줄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음식도, 식당도, 책도, 그림도, 모두 예술가가 만든다. 그 마음으로 만들 때 음식도, 식당도, 책도, 그림도 예술이 된다.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든, 직업에 갇히지 않고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예술가로 살기를.



#사장의마음 #김일도 #북스톤 #엄마의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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