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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희 Oct 23. 2019

X세대 엄마

편파적으로 공감해버린 <2020 트렌드 노트> 6장 이야기

<2020 트렌드 노트>의 핵심 주제는 '혼자만의 시공간'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가족공동체의 변화를 이끄는 주요 축은 '엄마의 변화'다. 그것에 관해서만 따로 후기를 쓰고 싶었다. 







‘소외되었기에 하는 소비.’     

<2020 트렌드 노트> 기획미팅 중 나온 얘기다. 홈쇼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고객분석을 했는데, 요즘 다들 그렇듯이 밀레니얼 세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홈쇼핑의 핵심고객층은 40~50대 중년여성인데 그들에게는 고객사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거 이상하다, 왜 이들은 마케팅의 관심영역에서 소외돼 있는가, 이런 호기심에 중년여성을 들여다보았더니 그들의 변화도 밀레니얼 못지않게 역동적이더란다. 오, 재미있겠다 싶었다. 트렌드라고 해서 남들도 다 말하는 것만 보여주란 법이 있나? 집에서 가장 큰 경제권을 가진 이들의 물밑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 중년여성과는 사뭇 다른 오늘의 중년여성들을 조명해보자.      


그런데 저자가 보내온 초고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가제가 ‘X세대 엄마’였다.

...나잖아.     


다음소프트의 분석은 여타 데이터회사의 분석과는 좀 다르다. 기법의 차이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고, 결과물만 봤을 때 가장 큰 차이는 ‘스토리텔링’이다. 숫자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스토리란 대개 한국사회의 변화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개인의 일생에 관한 것이다. 백수오를 팔기 위해 경쟁제품 분석을 하는 게 아니라 여자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식이다.

이번에도 그랬을 것이다. 드라이하게 말하면 중년여성이 어디에 새롭게 돈을 쓰기 시작했는지, 그래서 사업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챕터이지만, 돈 얘기가 아니라 이들의 일생이 펼쳐진다. 그 덕에 사회적으로 무명씨에 가까운 이 엄마들이 왕년엔 개성으로 똘똘 뭉친 ‘X세대’였다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난다. 문화적으로 풍요했던 90년대에 20대를 보내며 개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세대, 그러나 “비혼이라는 선택지가 없던 시절에 결혼해 엄마로 살 수밖에 없었던” 세대. 홈쇼핑을 안 보는 나는 4050여성에 대한 이야기라 했을 때에도 별로 동일시가 안 되었는데, 과거로 거슬러가는 이야기 앞에서는 속수무책 감상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읽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객관화는 물론이고,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           




혼자서 여행도, 공부도 하며 당당히 주체적 삶을 찾고자 하는 X세대 엄마들, 그럼에도 그들이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육아와 내 삶의 적정 밸런스를 찾고자 하는 밀레니얼 맘과 달리, X세대 엄마에게는 여전히 가족에 대한 희생정신이 남아 있다.
- <2020 트렌드 노트>          



요리는커녕 일주일에 한두 번 밥이나 겨우 짓고 나머지는 생협과 오아시스와 마켓컬리와 배달음식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집밥’을 안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히 있다. 집에서는 쉬는 것보다 집안일이 언제나 먼저인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옛날사람인가 싶은데,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심지어 맞벌이하며 삼시세끼를 훌륭히 건사해온 영웅들의 고충이) 실감나게 펼쳐진다.           



4050여성들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엄마,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가사노동의 공간이다. 2030여성에게는 파우더룸, 드레스룸, 내 방 등 나를 꾸미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4050여성은 집 안에 나만의 공간이 없다. 지긋지긋한 주방을 빠져나와도 치워야 할 아이방과 뒷베란다가 있으며, 닦아야 할 방바닥이 있을 뿐이다. 쉴 수 있는 곳이라고는 공용공간인 안방과 거실 정도다. 집에 마음놓고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없는 한 그들은 가사일과 완벽히 단절될 수 없으며, 엄마라는 역할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 <2020 트렌드 노트>              



아, 내가 이렇구나, 맞아 그렇지... 약간은 아련한 마음이 되어 원고를 읽다 보니 문득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었다. 부자여행, 부녀여행, 모자여행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시피 하는데 모녀여행만 쭉쭉 늘어나는 그래프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나도 수아랑 둘이 여행을 다녀왔고, 얘도 어딜 갈 때 그래도 아직은 엄마를 먼저 섭외하려고 한다. 나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몸소 침대에서 등을 떼고(!) 앞에 앉아서 수다를 떤다. 내가 얘한텐 괜찮은 엄마인가 보네, 하고 그동안 꽤 우쭐했는데 알고 보니 남들도 다 그렇다는 것 ㅋㅋㅋ 이래서 객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작은 위안도 주었다. 현실에 치여 자신을 돌볼 줄 몰랐던 많은 X세대 엄마들이 이제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게 점점 돈과 시간을 많이 쓰면서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격려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좀 편해졌다. 드로잉을 배울 때 ‘수아 미술학원을 보내는 게 먼저 아냐?’ 하며 한참 주저했는데, 이제 이런 식의 망설임은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시어머니가 혼수로 사주신 꽃무늬 그릇은 다 내다버리고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집을 채우기 시작한 그들은,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탐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점차 튼튼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것, 유용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찾을 것이며, 감성에 대한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 <2020 트렌드 노트>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곳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인망처럼 물밑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훑는 것, 이것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분석의 묘미이자 가치 아닐까 싶다. 이들을 ‘아줌마’로만 보는 고정관념으로는 이들의 변화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화할 수단이 있다면 이들의 변화,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가족의 변화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 유익하다는 말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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