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귀싸대기를 두 번 맞아보았다. 두 번 다 선생님에게, 그리고 다수의 친구들 앞에서.
뺨만 맞는게 싸대기고, 뺨과 귀를 같이 쳐 맞는게 귀싸대기인가 싶어 사전을 찾아봤는데 그냥 귀싸대기의 방언이 싸대기라고 한다. 첫번째 귀싸대기는 초등학교 3학년 합체시간이었고, 두번째 귀싸대기는 중학교 2학년 영어시간이었다.
때는 1993년, 언제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위아래로 긴 옷을 입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 봄 즈음 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일주일에 한번 ‘합동체육’, 즉 학년 전체가 운동장에 나와서 훈련 비슷한 걸 하는, 교련의 초등학생 버전 정도쯤 되는 수업이 있었다. 말이 수업이지, 비만 오지 않는다면 푹푹 찌는 여름날이든, 살인적인 추위의 겨울날이든 상관 없이 전학년생이 운동장에 오와 열을 맞추어 서서 약한 강도의 기합을 받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3학년들의 합체시간이었고, 차렷과 열중쉬어를 배우는 날이었다. 담당은 우리 반 담임이었던 체육선생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퉁퉁한 얼굴에 퉁퉁한 몸매의 남자 선생이었고, 꼭 술이라도 취한 듯 늘 얼굴이 불그스름 했는데 실제로 학교 근무 중 막걸리를 마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고작 삼학년이었던 나도 담임의 양복 카라에 늘 흰 반점이 몇 개씩 찍혀있던 걸 기억한다.
아무튼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줄을 맞추어 내 자리에 서서 선생님의 구호에 맞추어 차렷과 열중쉬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차렷, 열중쉬어, 다시 차렷! 구호가 울려 퍼졌고 차렷에는 절대 움직여선 안 된다는 호령이 몇 차례 있었던 뒤였다. 나는 대체로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는데, 그때 내가 미쳤었는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바로 그 차렷의 순간에, 한번 움직여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오른발을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움직여보았다.
아, 그때의 패기가 지금 한 톨이라도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학년생이라고 해봤자 여섯 반 밖에 안 되었고 나는 언제나 키가 작은 아이였기 때문에 내 자리는 앞에서 두번째 열 쯤이라 조회대 위에 있던 선생님에겐 내가 아주 잘 보였나보다.
“야! 거기 너! 누가 차렷에 까딱까딱 움직이래. 당장 튀어나와!”
설마 난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튀어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3학년 전체가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조회대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시선을 전체 아이들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차렷이라고 했지 이새끼야 중얼거리며 내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가 조회대 바로 앞까지 갔을 때, 그는 왼손으로 내 오른뺨을 잡고 오른손으로 내 귀싸대기를 쳐 올렸다.
그날 난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아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전학년생 앞에서 귀싸대기를 맞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거의 대부분 체육복을 입고 있던 합체시간에 평상복을 입은 채로 귀싸대기를 쳐 맞았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그날 입었던 바지가 민트색이었다는 게 아직도 기억날 만큼.
그리고 5년 후. 내가 다녔던 여자 중학교의 영어선생님은 전교에 악명이 자자한 K선생이었는데, 농담으로나 들었던 바뜨(but), 바스케트 보울(basketball) 등의 발음을 실화로 들려주던 선생님이다.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그런 올드한 발음 따위가 아니라, 수업 중 일상적으로 행하던 폭언과 폭행, 두발규정에 걸린 친구들의 머리카락을 교무실에서 사정없이 가위로 잘라버리던 악행들 때문이었다.
나는 의외로 꽤나 착실한 학생이었기에 머리카락이 잘린 일 까지는 없었지만, 미용실 갈 타이밍을 놓쳐 머리 길이가 귀밑 2센치에서 3센치 정도로 넘어갈 때 즈음 복도에서 느닷없이 뒷머리를 휘어잡힌 적은 있다. 당시 우리학교의 두발규정은 귀밑 2센치에 똑딱이핀으로 앞머리를 모두 올려야 했다.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으면 저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라 기분 나쁘기 때문에 만든 규정이라며 K선생이 나와 내 친구들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날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 영어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K선생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날도 내가 미쳤었던 것 같다. 수업중에 아무 맥락없이, 불현듯 초등학교 6학년때 사물놀이 특활 시간에 배웠던 굿거리 장단이 생각났다.
덩 기덕 쿵 더러러러 쿵기덕 쿵덕.
머릿속으로 그 장단을 몇번 흥얼거리다 나도 모르게 장단에 맞추어 손뼉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짝 짜작 짝 짜라라라 짝 짜작 짝짝.
다행인건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손바닥을 맞대는 정도로 실행했고, 한 장단이 끝난 뒤 헉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이미 때는 늦었다. 단상 위의 K선생이 소리쳤다. “너. 나와.”
단상 앞에 거의 도착하는 동시에 H선생의 양손이 내 양 빰의 귀싸대기를 쳐 올렸다.
“들어가!”
그 와중에도 선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평소 학생을 쳐 때려놓고도 들어갈 때 인사하지 않으면 버릇이 없다며 더 때리던 선생이었다. 들어가는 내 등에다 대고 그 선생은 소리쳤다.
“어디 수업시간에 무당춤을 추고 있어?”
두 사건으로부터 20여년이 넘는 긴 시간이 지났다. 딱히 그 사건들로 인해 내 성격이 삐뚤어지거나, 교사들에 대한 분노가 생긴 건 아니다. 여전히 난 선생님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했고, 귀밑 2cm와 앞머리 똑딱이를 칼같이 지키며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이 두 사건 역시 어쩌다 한번씩 생각이 나면 무용담처럼 친구들한테 하던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쓰다보니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직도 화가 난다는 사실을. 첫번째 사건의 디테일을 떠올리면서는 그때의 내가 불쌍해서 살짝 눈물까지 났다.
쿨하게 마무리하려 했는데...화가 나서 안되겠네. 그때 그들이 저런 짓들을 했다는 사실을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굳이 글로 남겨서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라도 욕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한 정도는 별것도 아닐 정도로 선생으로부터의 구타가 일상이던, 그렇게 쳐 맞고도 인사를 하고 들어가던 수많은 나와 내 이전 세대의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기를...은 무슨. 실상은 그래, 맞다. 그냥 욕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덧: K선생에게 이런 저런 일로 당하고 씹어먹을 듯 그녀를 저주하는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그래봤자 90년대 시골동네의 여중생들이 모여서 욕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용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즈음에 K선생이 아파서 한동안 결근을 한 걸 두고 내 한 살 위 선배 중 하나가 K선생의 죽음을 빌며 연화산(태백산 다음으로 영험하다는 산이다)에서 돼지머리 갖다놓고 고사를 지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교내에 돌았다. 얼마 후 다시 학교에 나온 K선생은 어쩐지 그 뒤로 악행과 폭언의 강도가 한차례 힘이 빠진 듯 했는데, 단지 아프고 난 직후여서 그랬는지 정말로 고사를 지낸게 신통력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