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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바람처럼 Dec 12. 2018

오랜만에 찾아온 짜증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증이다. 

짜증이라는 감정은 분노나 우울과는 달라서 특별한 원인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정말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어렵다. 


어제부터 조짐이 좋지는 않았다. 

3주 만의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렇게 저렇게 이어지는 그의 짜증이 얹힌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운이 빠져나갔고, 더 이상은 여느 때처럼 웃으며 넘겨지지가 않았다. 

그의 부정적 감정을 받아내기에 이제는 지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내려줘. 집까지 걸어갈게." 

"삐졌어?"

"아니야. 회사 잘 갔다 와."


혼자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오는 길. 참아왔던 혼잣말들이 터져 나왔다. 

"아기는 나 혼자 가진 건가? 병원에 같이 가는 것이 당연한데, 마치 큰 일 해준 것처럼 사람 무안하게 한다."

남편은 전화를 걸어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 속에 시작된 대화는 좋게 좋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태동 검사하는 동안 추위를 느껴서인지 나는 슬슬 감기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까지도 짜증 나는 이유를 하나하나 헤아려 본다. 


하나, 남편이 신경 쓰고 있는 것들 중 우선순위에서 나와 아기가 밀려난 느낌이 든다. 


회사 업무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렇다 치고.

요즘 화두로 떠오른 시댁의 자동차 구매 및 보험 문제를 다 떠안을 모양새를 하면서

다음 달에 태어날 아기의 출산용품 이야기를 하면 '꼭 필요해?', '안 사는 게 좋을 거 같은데.'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수입도 없는  노부부가 있던 차도 처분해야 할 마당에 

새로 차를 사는 것에 대한 내 의견이 저렇다만, 

'솔직하게 말하면'이라는 말로 비난과 분노를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 참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나와 아기가 얼마만큼이나 자리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둘, 결국은 돈으로 귀결된다.


자식 넷 중 남편 혼자 시부모님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생활비까지  부담하는 것도 답답했는데, 

아무 수입도 없는 분들께서 운전을 시작하신다니...

중고차를 산다 쳐도 보험료와 유지비를 감당할 계획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휴직 중이라 일 년 간은 외벌이고, 내년에 아기가 태어나며, 대출 상환도 집값의 삼분의 일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다. 자식은 화수분이 아니다. 

둘이 월급만 받아서는 10년 후, 20년 후가 감당이 안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셋, 파이를 키울 뭔가를 해야만 하는 건 알겠는데 눈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트렌드 공부를 해도 붙잡을 만한 무언가가 보이질 않는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이제라도 재테크를 시작해야 하는지,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늘어나는 것이 짜증이다. 


복직을 빨리 해야 하나? ==> 하기 싫다 ==> 짜증 대폭발!!!! 


Dec. 14 2018

위에 쓴 글들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지울까도 고민했는데 그냥 두기로 했다. 

나의 바닥 정서. 


어제 4시간의 폭설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TV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집 안에 하루 종일 머물렀다. 

전날의 우울과 짜증이 계속되는 와중에 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북유럽이나 영국의 날씨가 그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 준다고 하던데, 어제 날씨가 나에게 그랬다. 


10년, 20년 후를 말하면서도 어쩌면 나는 1,2년 앞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복직과 육아휴직과 그 외 여기저기 당장 들어갈 돈들에 대한 편협하고 단편적인 근심에만 머무르는 생각들. 

내리는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5년 후가 걱정되면 5년의 플랜을 짜면 된다. 

10년 후가 걱정되면 10년의 플랜을 짜면 된다. 

조급해하지 말고 마음속 깊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 된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시작 또한 미미하였다. 

그 속에서 난 조금씩 변했고, 성장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일단 시작해보자. 


어쩌면 조금 더 어려운 환경에서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 걸음 더 내딛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플랜, 플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찾아보자. 

또 눈이 내리길 기다려본다. 

깊이 생각에 잠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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