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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Feb 14. 2022

회색 그림자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하는 힘.

한 학기 월세 30만 원, 방이 세 개인 컨테이너 건물에는 다섯 명의 여학생이 새 학기를 맞아 입주했다. 군산과 멀지 않은 전주와 정읍에서 온 친구들이었고 그중 나는 가장 먼 지역에서 와 ‘감자’라는 놀림을 받곤 했다. 고3 때 취업을 나가 모은 돈은 총 300만 원이다. 등록금 90만 원, 한 학기 집세 30만 원, 이런저런 경비를 치르고 나니 통장에는 150만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와중에 원수 같은 친오빠가 90만 원을 빌려가 갚지 않았고 잔고는 바닥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나는 학교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그 해 2001년 봄에는 다른 때 보다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손발이 시렸다.     


우리와 맞은편 방에서 혼자 지내는 영록이는 말이 많았고 늘 찜질방에서 방금 나온 것처럼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에 넣어 둔 먹을거리를 가끔 내게 나누어 주었고, 그 음식은 늘 맛이 좋았다. 나와 방을 쓰던 향미 언니는 없는 옷을 조합해 세련되게 입었고 너스레를 잘 떨었다. 그녀는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기타를 잘 치고 목소리가 좋은 원일 선배의 사랑을 받았다. 캠퍼스를 걷거나 중창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여행스케치의 ‘나의 노래는’을 부르면 답답하게 눈앞을 가리던 걱정들이 자취를 감추곤 했다.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간단한 군것질을 하기 위해 동네 슈퍼에 들렀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가 한눈에 들어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에, 입에 넣으면 촉촉하고 사르르 달콤하게 녹아 목으로 넘어갈 것 같은, 포장마저 무척 근사해 보이는 쿠키였다. 겉 포장지에는 ‘샤브레’라고 적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집어 입으로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는 그날 그 쿠키를 먹지 못했고 대학 생활은 한 학기 만에 끝이 났다.     


휴학 후 운이 좋게 공공기관에 들어가 16년간 따박따박 월급을 타고 못다 한 공부도 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잊고 지냈다. 마흔의 나이를 목전에 두고 희망퇴직금을 과분하게 받아 회사를 나왔고, 작은 책방을 열어 운영 중이다. 한데 서점 수입만으로는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다. 만 원짜리 책을 한 권 팔면 3천 원이 남는데, 그마저도 10% 할인을 해주니 2천 원이 남는다. 한 달에 600권은 팔아야 월세를 내고 용돈도 쓰겠지만 200권도 팔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요즘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아니 수시로 그 시절을 떠올린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먹고사는 것에 대한 염려이며 ‘이러다 망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식빵을 살 때도 여러 번 생각하고, 먹는 것 외에 다른 지출은 하지 않으며 입만 열면 돈 얘기를 꺼낸다.      


지금 내겐 당장 쫄딱 망해도 안전망이 되어줄 남편이 있다. 그러나 스무  언저리에서 경험했던 가난,  회색 그림자는 나를 끝없이 따라오고 앞으로도 아등바등 조바심을 내며 살게  것이다. 그러나  가지를 안다. 가난했던 지난날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고 싶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손님이 커피값으로 지불하는 4 원이,  원짜리   권을 팔고 남은  3 원이 귀한 돈인 만큼 그들에게 친절하고 싶은 마음. 2,500짜리 모닝빵을 사며 빵집 사장님께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은 그때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회색 그림자와 함께 근근이, 지지리 궁상을 떨며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니 책방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과 호화로운 회식을 하는 꿈을, 지금보다  먹고  살아가는 꿈을 꾸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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