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기억에 남는 설교가 있다.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이었다. 목사님은 온유함에 대해서 '자식과 복싱 게임을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지금까지 그만큼 탁월하게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난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온유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둘 다.
페이스북에서 몇 년 전에 쓴 글을 보았다. 큰 딸이 언니 오빠들에게 밀려 케이크 촛불을 끄지 못해 서운해하던 것을 달래던 내용이었다. 나는 아이가 늘 양보하고 져주길 바랐다. 지금도 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다만, 양보하고 손해 본 만큼 아빠가 채워주리라 약속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손해보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세상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 호의를 베푸니까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흔하다. 뒤통수 맞았다는 이야기, 배신당했다는 이야기, 이용만 당했다는 이야기가 넘친다. 그런 사회에서 마치 착한 바보가 되라는 요구처럼 들릴지 모른다. 사실 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큰 문제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국가권력일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사례는 누구 말마따나 초미세먼지처럼 우리 안에 일상화된 폭력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분노하고 반응하는 것들은 그런 거대한 담론들이 아니라 내 친구, 가족, 동료, 종업원 등이다. 내가 기꺼이 화를 내어도 될 만한 사람들에게 내 권리를 요구하고 이겨내려는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모습이 쌓여서 초미세먼지가 되는 걸 말이다.
져줄 수 있을 때, 져 주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큰 욕심이다. 양보하고 나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만큼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니까.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나, 지위, 권리, 힘 일 수도 있겠지. 낭만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바꿔 생각해 보면, 져준다는 것은 결국 내가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대상은 그만큼 나보다 약자이어야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과 복싱 게임을 하면서 이겨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가진 잉여를 나눠주는 시혜보다, 내가 누릴 권리를 내어주고 한 발 물러서 손해 볼 수 있는 것. 어쩌면 더 적극적인 평화의 행위이자 이웃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약자를 사랑할 것이요.
셔먼이 스누피에게 간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했다. 한편으로는 스누피를 밖으로 쫓아내지 않고 스스로 식탁에서 물러난 양보의 모습을 발견한다. 스누피가 셔먼의 온유한 성품을 발견하기 바라며.
#온유 #양보 #평화 #사랑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