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등산화
이누이트의 깃발이라는 말이 있다. 이누이트족은 화가 나서 잔뜩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하염없이 착잡한 날에는 깃발을 하나 챙겨 집을 나선다. 그리고 정처 없이 설원 위를 걷는다고 한다. 눈 위에 찍히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답답한 마음을 눌러 담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을까.’
무거운 속마음을 발자국으로 덜어 내다보면 어느 순간 가슴 속이 하얀 눈처럼 비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 사실 내 탓, 남 탓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이때 가져온 깃발을 꺼내 바닥에 푹 꽂는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 또 다시 답답한 일이 생길 때면 새로운 깃발을 챙겨 집을 나선다. 꽤 커다란 근심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예전에 꽂았던 깃발이 나타나지 않는다. 별것 아닌 고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물론 예전의 깃발을 지나쳐 더 먼 곳에 새로운 깃발을 꽂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마음속에도 깃발을 하나 꽂는다. 그리고 근심거리가 생길 때마다 마음속 깃발의 거리와 가늠해보며 이보다 가벼운 고민들은 훌훌 털어내 버리는 것이다.
언젠가 책에서 이 이누이트의 깃발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딱 내 얘기다 싶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정처 없이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둘러싼 공간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재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누이트의 깃발처럼 복잡한 마음을 어딘가 먼 곳에다 훌쩍 털어놓고 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걸어갈 때도 있고, 귀가길에 몇 정거장 일찍 내려 집까지 걸어갈 때도 있다. 이런 내게 100km 걷기라는 도전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한번 걸어봅시다, 옥스팜 100km.
이 위대한 여정의 시작은 우리 회사 대표님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옥스팜 트레일워커. 세계적인 기부 프로젝트로서 물을 구하기 위해 100km 거리도 마다않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열리는 걷기 대회다. 4명이 1팀이 되어 38시간 동안 100km를 완주하는 트레킹 경연대회이기도 한데, 마침 회사 내에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어 금방 4인 1조를 이룰 수 있었다. 올해 국내 대회는 8월 말 강원도 인제에서 열릴 예정이다.
인생에 구실이 생기고 목표가 생기면, 그 다음은 무슨 단계가 찾아올까? 바로 ‘장비빨’이다. 목표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보다 멋진 모습으로 성공하기 위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템’을 향하게 된다. 물론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때로는 목표보다 장비 그 자체에 집중하느라 자산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던데… 다행히 나는 등산화에만 눈길이 갔다. K2 매장을 찾았을 땐 사장님의 화려한 영업 스킬이 발동되었지만,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 하나로 맘에 드는 등산화 한 켤레를 재빨리 고를 수 있었다. 마침 행사 중이라 할인도 받고 등산용 양말 한 켤레로 사은품으로 받았다.
등산화는 무겁고 불편할 거라는 내 편견과 달리, 생각보다 가볍고 발에 착 감겼다. 발에만 익으면 100km도 문제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주말에는 봉화산 둘레길 맹훈련을 거듭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팀원들과 평일 월차를 내고 북한산을 오르기도 했다. 모두 완주를 목표로 철저한 훈련과 시뮬레이션을 거쳐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가파른 경사 앞에서 걸음이 느려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100km 결승점에 꽂을 이누이트의 깃발을 떠올리며 더욱 속도를 내었다. 초여름 땡볕에 땀이 흘러내리는 만큼 마음은 가볍고 개운했다.
철학자 니체는 ‘영원 회귀’라는 말로 영원히 반복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순간을 표현했다고 한다. 만약 나에게 영원 회귀가 있다면 마지막 깃발을 꽂을 땅을 향해 끝없이 걷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19년 8월 31일. 오전 6시에 개최된 옥스팜 트레일워커 국내 대회에서 우리 팀은 9월 1일, 전원 완주로 화려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