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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날

by 와칸다 포에버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정리다.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물건을 버리거나 중고 거래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 행동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의식이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밤 감성’에 취해서 글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추파를 던지는 등 나중에 창피한 일이라고 깨닫고 이불을 걷어차는 패턴과 비슷하다. ‘정리 감성’에 취하면 갑자기 우유부단한 마음도 칼같이 변한다. 물론 후회하는 때도 있지만 취하더라도 밤 감성보다는 조금 더 이성적이다.


정리 감성이 일어나면 조금은 쓸모가 있다고 여기거나 유비무환을 외치며 가지고 있던 물건이 괜히 내 방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실제와 일치하는 때가 더 많은데 당장 쓰기보다 오랜 시간을 사용하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재를 잊은 채 살다가 정리하다가 ‘이런 게 있었구나.’라고 새삼 깨닫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런 잘못을 멈추겠다며 이들을 처리하면 묵은 때가 씻겨나간 느낌이 든다. 이번에는 이 기분이 두 배로 들었는데 주변에 보이는 물건뿐만 아니라 핸드폰 안의 연락처도 손을 봤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관계가 폭 넓은 사람이 아닌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연락처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핸드폰으로 살 때부터 실수든 사고든 연락처가 지워지는 일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교체할 때도 연락처가 지워지지 않고 새 핸드폰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연락처도 쌓이고 쌓였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중에는 분명히 번호의 주인이 바뀌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사용하는 연락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연락처를 지우지 않았던 이유는 누군가 내게 해준 조언 때문이었다. 사람의 연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를 쉽게 지우지 말라고 말했다. 언젠가 다시 연락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수긍이 가서 웬만한 연락처를 지금껏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라도 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음에도 상대는 내 연락처를 지운 지 한참 된 때가 있었다. 그런 일을 직접 보니 내가 상대를 중하게 여기는 비중이나 상대를 향한 태도가 반대의 견해와 차이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자주 했다면 그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살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소원해진 걸까? 그렇다면 이것은 내 잘못일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꾸 이런 생각이 들면 죄책감의 늪에 빠질 뿐이다. 어쩌면 상대와 달리 내가 관계에 있어 깔끔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이 사람과 인연을 이어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미련이나 집착일 수도 있겠다.


누구든 필요하면 찾게 된다. 이 사람들이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내게 연락할 것이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연락처를 하나씩 지웠다. 하지만 신중하게 했다. 한 번에 다 지울 수도 있지만 일단은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연락하지 않는 연락처를 지웠다. 살이 빠진 것도 아닌데 내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올해 정리의 날은 방만 정리되는 게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도 함께 정리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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