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났지만 아직 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아이들에게 수행평가로 수필 쓰기를 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수필을 직접 써야 한다는 당혹감이 교실에 퍼지는 것이 보여 컴퓨터를 안에 있는 파일을 열어 수필 하나를 읽어주었다. 개학 날 장염에 걸려 수업 대신 자습을 준 채 교탁 뒤에서 끙끙대다 결국 조퇴를 한 내가,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는 그날의 내가 그 수필 안에 그려져 있었다.
- 누가 쓴지 알 것 같지? 특별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구든 쓸 수 있는 게 수필이지.
그러고는 지금의 아이들과 같은 나이인 17살의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어느 날, 국어 선생님께서는 수필 쓰기를 숙제로 내주시며 잘 쓴 글들은 모아서 책으로도 낼 계획이라 말씀하셨다. 아직 공부에 관심을 두기 전인 그 시기의 나에게 작문 숙제는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어서 미루고 미루다 검사 전날에서야 친구와 산길을 걷다 길을 잃어버려 소방관들에게 구조된 이야기를 지어내 썼다. 나의 거짓말은 보란 듯이 걸렸고 선생님은 글을 다시 써오는 벌을 주셨다. 안 그래도 하기 싫었던 숙제였는데 다시 써오라니, 이번에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학교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썼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에서 서서 조는 나를,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다 멀리서 학교 건물이 보이면 저놈의 학교를 누가 좀 폭파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잔뜩 썼던 기억이 난다(그러고 보니 그 글이 나의 첫 수필이었다). 다시 써온 숙제를 내 앞에서 읽으시던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몇 달 후 정말로 출간된 책 속에 내 글도 실려있었다.
- 대체 왜? 뭐 때문에 감동적인 글들 사이에 선생님 글이 실려있었을까? 학교 욕만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 선생님이 쓴 글에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아니 어쩌면 매일 떠올리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해.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솔직한 마음을 좋게 보셔서 그 책의 한쪽에 선생님의 글을 실어주시지 않으셨을까?
솔직히 오늘 아침에 너희들도 떠올린 생각 아니었냐는 말과 함께, 너희들 안에 있는 어떤 이야기든지 상관없으니 꾸며내지 말고 솔직하게만 써보라는 요구 사항을 전했다. 그렇게 학생들은 15점짜리 수행평가를 위해 800자부터 많게는 2,000자가 넘는 글을 써서 냈고, 그 글들을 겨울이 된 최근에서야 채점을 위해 꺼내 읽어본 것이다. 채점하기 위해 야근을 하던 저녁, 학생들의 글을 읽는 동안 자꾸만 미소가, 때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점수만 받으려 대충 쓴 글들 사이에 진심이 꾹꾹 담긴 글들이 꽤 많이 있었다.
활발하고 똑똑해 보여 중학생 때부터 뭐든지 잘해왔을 것 같았던 태우는 알고 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야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해 봐서 여전히 공부라는 존재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항상 차분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좋아 보였던 민규는 사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심하게 혼 나가며 예절을 배워온 탓에 할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조금씩 용서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많이 자서 내게 자주 혼나는 학생 중 서원이는 원래 다른 꿈을 위해 특성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강한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오게 되어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고, 은석이는 공부를 강하게 몰아붙이는 우리 학교에 공부가 아닌 관악부를 바라보고 왔기에 수업보다 음악실에서 호른을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이 밖에도 첫사랑의 아픔을, 소외된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을,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아이들이 글 속에 있었다. 봄부터 겨울이 된 지금까지, 일주일에 두세 번씩이나 수업으로 만나왔으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모습들이 낯설어 보이기도, 기특해 보이기도 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이미 하나의 삶이 채워져 있다는 모습을 보다 문득 내 학창 시절의 국어 선생님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전날 채점을 했던 반에 들어가 수업을 하기 위해 칠판 앞에 섰다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서준이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농담을 던지며 재밌는 분위기를 조성했겠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서준이 뒤로 어제 본 서준이의 이야기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집중하려는 태우 뒤로도, 오늘도 역시나 차분히 앉아 있는 인규 뒤로도, 웬일로 안 자고 있는 서원이 뒤로도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다. 내 눈에만 비치는 진기한 풍경과 그 풍경이 주는 묘한 감정에 도저히 수업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 사실 어제 너희들이 쓴 수필을 채점하려고 글을 다 읽어봤든? 근데 지금 그 이야기가 너희들이랑 같이 겹쳐 보여. 안 믿기지? 진짜야. 너희들의 솔직한 이야기 잘 봤어. 서원아, 울 학교 오기가 그렇게 싫었어? 그래서 수업 시간에 자주 잔 거야?
내 말에 서원이가 웃었다.
- 선생님이 조금 더 빨리 채점할걸. 아니, 수필 쓰기 수행평가를 1학기 때 내볼 걸. 그러면 너희를 조금이나마 더 빨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쉽더라.
학생들도 신기한 듯 내 이야기를 듣다가, 한 학생이 누가 1등이냐고 물어보았다.
- 1등?
- 선생님이 예전에 제일 잘 쓴 1등 뽑아서, 매점 쏜다고 했어요!
- 미친, 내가 그런 손해 보는 공약을 걸었었다고?
이번에는 모두가 웃었다. 글 쓰기 수행평가 덕분에 또 이렇게 학생들과 한참을 웃고 떠드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국어를 가르쳤고, 글을 읽어왔고, 또 책도 내보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행위가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다. 형식만 맞으면 흔한 이야기도 만점인 수행평가에, 심지어 독자도 선생님 한 명뿐 상황에 아이들은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원망을 담아내었다. 무엇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건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며 그동안 내가 본 아이들의 모습들을 통해 나는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조금씩은 있다는 걸 알았다. 쓸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뿐,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기록을 해온 인간에게는 쓰고자 하는 욕망이 일종의 유전처럼 지금도 전해온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이 어떻게 생겼을까? 그건 글이 가진 따뜻한 온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글로 쓰기 위해서는 자기 안을 몇 번이나 들여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맞는 단어를 고르고, 표현을 선택하고, 문장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무언가’에는 손때가 묻게 되고 그 손때를 통해 손의 온기가 글로 전해지기에 글은 자연스럽게 따뜻해질 수밖에 없다. 추운 겨울이면 따뜻함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처럼 우리는 차가운 현실을 피해서 따뜻한 글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서점의 서점 지기인 다혜 님께서 따님과 있었던 일을 들려주셨다. 자신의 산문집을 읽은 딸이 글 안의 엄마가 평소의 엄마보다 더 착해 보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함께 웃느라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이 역시 글의 온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 않을까? 글을 쓴 사람이 글 안에서 조금 더 착해 보인다면 그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써서가 아니라 글이 가진 온기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그 온기가 평범한 사람을, 반복되는 일상을, 어쩌면 냉기가 더 많은 우리의 삶을 특별하게,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일지도. 선생님인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글을 쓰는 동안 아이들도 잠시나마 그 온기를 만났겠다고 본다. 그리고 글을 다 완성한 후에는 모닥불 하나를 다 쬔 기분을 느꼈으리라 믿고 싶다.
글을 쓴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아이들이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야기와 느끼지 못했을 경험이었다. 어떤 일들은 말이 아닌 글이어야 풀어낼 수 있고, 어떤 감정은 말보다 글로 썼을 때 더 잘 전해지기도 한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한 번씩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래서 독자가 자기 혼자일 뿐일지라도,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우리만의 작은 세계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따뜻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자신의 이야기를 인용하게 허락해 준 태우와 인규와 서원이와 은석이에게, 그리고 오케이슬로울리의 다혜 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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