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에 대하여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천천히 다정을 다시 배우겠다.

by 임성현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다시, 천천히 다정을 배우겠다.

요즘 나는 다정함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다정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다정함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하여 진짜 다정한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오늘도 나는 다정한 이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 실패하더라도 다정해 보이는 사람이 아닌 다정한 이가 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정하다고 말해줄 때면 나는 어디라도 숨고 싶어진다. 결코 내가 다정한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말과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올해 들어 이 간극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역시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로 다정한 이는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먼저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런 결론을 가진 채 지내던 여름날, 자주 가는 서점에서 서점 대표님의 짝꿍께서 직접 만든 테이블과 요리를 마주한 일이 있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일. 테이블과 접시에 담긴 요리를 오래 지켜보며 나는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이런 정성을 쏟아 본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장염에 심하게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 건 아무런 약도 없던 서랍장이었다. 스스로에게 정성을 쏟기는커녕 마냥 소홀했던 나였다. 퇴원 후 내가 있는 곳을 어지럽히려 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고, 목공 수업을 다니기도 했다. 누구보다 나에게 먼저 다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가족 특히 아빠와 엄마에게 다정해지기.

무뚝뚝한 아들은 아니지만 살가운 아들도 아닌 나는 아빠와 엄마에게 자주 잔소리를 하거나, 그들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귀찮아할 때도 많았다. 대통령이나 과학자, 아니면 우주비행사를 말하는 어린아이들의 꿈처럼 부모님께 다정해지는 일은 내겐 너무나 막연한 일이다.

그러던 중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이번 여름의 어떤 하루들이 내게 특별한 날이 됐었듯, 추석을 부모님을 향한 내 태도를 바꿔보는 분기점으로 삼고 싶어 부모님과의 1박 2일 여행을 준비해 보았다. 화담숲의 입장권과 케이블카를 예약하고, 고양시에 사는 작은아버지와 저녁 약속을 잡고, 하루를 묵을 호텔을 알아보면서 이렇게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 만인지 떠올려 보았다. 심지어 형도 없이 부모님하고만 떠나는 여행이라니. 갑자기 드는 어색함에 어쩌면 1박 2일이 짧으면서도 긴 시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여행을 떠나기 전날, 부모님과 식사를 하며 나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안내했다.

1. 운전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기(특히 아빠)

2. ‘돈 아까우니 이 돈이면 그냥’ 같은 말 하지 않기(특히 엄마)

3. 원하는 것이 있으면 출발 전에 미리 말하기

이외에도 몇 가지를 즐거운 여행을 위해 농담처럼 건넸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내가 쉽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다정은 그렇게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부모님에게 다정할 수 있는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부모님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예약해 둔 케이블카를 놓쳤을 때나 출발한 후에나 무엇을 찾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사소한 순간에도 나는 쉽게 짜증을 냈고, 잔소리를 했다. 여행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어느새 부모님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함께 온 여행이 아닌데. 운전을 하는 내내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와 나를 발목부터 가슴까지 잠기게 했다. 친구들이나, 친한 사람들과 여행을 왔어도 이렇게 행동했을까? 타인에게는 쉬이 다정하면서도 어째서 내게 생을 주고 삶을 내어준 이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건지.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너무나 처참한 패배였다.

고양시로 가는 도중에 큰 도로로 빠져 나오자 아빠가 오랜만에 와본다는 말을 꺼냈다. 와본 곳이냐고 물어보자 트럭 운전을 하실 적에 자주 다니던 도로라고 하셨다.

- 서울은 가봤어?

- 아니, 서울에는 양계장이 없으니께 근처 농장이 있는 곳만 다녔지.

양계장에서 공장으로, 트럭에 닭을 싣고 새벽 도로를 달리던 아빠에게 서울은 늘 멀리서 지나치는 곳이었다.

- 엄마는?

엄마는 스무 살 때 서울에서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한번 올라와 본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이번 여행이 두 분의 첫 서울 여행이라니. 감기는 눈을 비비며 서울 언저리의 새벽 도로를 달리는 젊은 모습의 아빠와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역에 서 있는 앳된 엄마를 떠올려 보다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살아온 시대가 다른 만큼 세대가 겪는 경험의 폭이 다를 수 있다고 여겨왔지만, 해외도 아니고 고작 서울 여행이 처음이라니. 그들의 삶을 뒤에 태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시선을 앞 유리창 너머의 하늘에 두었다. 그러자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낸 모든 짜증이 먼 데서부터 파도가 되어 밀려와 이번에는 나를 머리끝까지 덮었다. 괜히 창문을 내려 바람으로 밀려오는 감정을 밀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온종일 실패만 하는 하루였다.

아주 오랜만에 작은아버지 댁 식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호텔로 향하는 길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호텔은 와봤는지 물었다. 엄마는 신혼여행 때 대전의 유성온천 호텔에 가본 적은 있지만 신혼여행에 따라온 아빠 친구네 식구들과 밤새 술을 먹고 취해서 정작 호텔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하셨다. 술을 좋아하는 엄마답다는 생각과 함께, 이미 몇 잔을 걸친 엄마에게 이따가 호텔 근처에서 아들과 한 잔 더 할 때에는 취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씻을 준비를 하는 동안 부모님 방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얼 하는지 물어보려다 어서 씻고 잠들고 싶은 마음에 그만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긴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입고 나오자 내 방 침대 옆의 협탁에 작은 쪽지가 놓여있었다.

‘아들 오늘 많이 고생했어~ 고마워… 사랑해 ♡♡’

결국 마지막까지 다정한 건 부모님이었다. 하루 사이에 내가 수없이 실패한 다정을 엄마는 이 늦은 시간까지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있었다. 쪽지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고 있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방에 들어와 내가 입고 있는 가운을 가리켰다.

- 가운은 어디서 났어?

옷장에서 흰 가운을 꺼내 엄마에게 건네자 엄마는 옷 위에 가운을 두르고 입고 남은 가운을 아빠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아빠와 나를 소파 옆에 앉히더니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 하셨다.

- 가운을 입고?

가운마저도 처음인 엄마는 이미 신이 나셨다. 그런 엄마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저기 봐요, 아빠는 좀 웃고. 자, 이제 찍어요.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기 이전,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게 낯설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들은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세상을 보여주려 했었다. 그때 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처음이었을까?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젊은 아빠와 그보다 더 어렸던 엄마는 궁금한 것도, 그만큼 서툰 것도 많았던 내게 짜증을 부리는 대신 내가 다치지 않도록 걱정해 주었고, 귀찮아하는 대신 내가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 써주었었다. 당신들의 그 태도가 내가 아는 다정의 시작이었다.

부모님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을 알았던 나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부모의 두 손을 맞잡아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천천히 다정을 다시 배우겠다. 엉금엉금 걷다 넘어지는 실패를 통해, 나는 다정해 보이는 이가 아니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글, 사진 : 임성현

네이버 블로그 : 노을이 다 지기 전에

Insta : @always.n.alldays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