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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9. 2021

#44 미로(迷路)

-팔괘도-

“너는 결국 저들의 이용감밖에는 되지 않겠지.”     


묵철이 잡고 있는 채찍을 강하게 끌어당기자 빙그르르 돌며 휘가 그에게 따라왔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잡기도 전에 그의 목에서 날카롭고 비릿한 쇠향이 코끝에 느껴졌다. 그녀가 검처럼 든 날카로운 촛대 끝이  정확히 묵철의 울대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휘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수년 전 금전산에서 보았던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과 겹쳐졌다. 그리고 그 뒤에 떠오르는 눈동자.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여인의 얼굴이었다.      


“나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녀 또한 이곳을 나가야 했다.      


“너는 왕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

  

“오늘 네 남편이라는 작자는 다른 후궁을 들이겠지. 그리고 나면 태평공주는 과연 너를 다시 돌려보내 줄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제까지 안에서 보지 못했던 전경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전각 주변으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였고, 거기에 여덟 개의 길이 나 있었다. 길에 따라 들고 나오는 것이 어려워 이곳에서 한 번 길을 잃으면, 그 안에서 죽을 수도 있는 구조였다. 들어오기는 쉬우나 나가기 어려운  미로.  

   

이름하여  팔괘도였다.  

휘는 헛웃음이 나왔다.

태평공주는 애초에 자신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주변의 산과도 떨어져 있어 자객의 침입도 어려웠다.  그녀는 하늘을 살폈다. 달은 아직 만월이 되지 않았지만,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별들이 총총히 반짝이고 있었다.      

휘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들어왔지?”     


그가 웃었다.      


“나는 이 구조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지.”

“!”

“건안성!”     


 건안성은 천에 요새라고 불릴 만큼 높은 산등성이와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이었다. 북으로는 험한 산맥이 이어져 있었고, 아래로 세찬 벽계수가 흘렀다.


상대적으로 남쪽이 약했던 건안성은 이곳에 ‘팔괘도’라는 미로를 만들었다. 함부로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구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건안성의 방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팔괘도는 흑치상지가 고안한 것이었다. 미로를 만들어 적들을 가두어 섬멸하는 것. 언제나 수적 열세에 있었기에 공격에는 게릴라 전술을, 방어에는 함정을 만들어 놓거나 장치를 고안하는 데 힘을 썼다. 팔괘도는 흑치상지가 살아생전에 만든 최고의 작품이었다.      

지금 그 미로에 그녀가 갇힌 것이었다.    

 

‘뒤로 갈수록 모략과 함정은 악랄해지는 법이니!’     


휘는 묵철을 돌아보았다.      


“나가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 왜 들어온 것이오?”

“공주는 알 거 아닌가? 나가는 법을!”     


뱀처럼 음흉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렸다.

이곳은 어차피 자객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자신이 나가지 않는 한 그도 나갈 수 없었다.

     

“내가 나가는 길을 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뭐라고?”     


휘는 촛대를 버리고 다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내가 여기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요?”     


그녀가 묻자 묵철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서 앞장서라!”     


낮게 으르렁대는 그의 눈에 살기가 번졌다.

      

“왜 내가 알 거라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모르오!”     


그녀는 보란 듯이 엎어진 의자를 끌고 와 탁자 앞에 앉았다.      


“전각을 지키는 군사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쯧쯧!”     


그녀는 전각 주변에 쓰러진 군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말에 묵철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대는 이곳에서 죽겠지만, 나는 아니지! 쿡쿡!”     


휘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그와 나가면 이번에는 그의 손에 잡힐 신세였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     

 

“태평공주가 나와 손을 잡은 이상, 내가 이곳에서 죽는 일은 없을 거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상태에서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을 더 바랄지도 모르겠지.”    

 

휘는 그냥 침묵했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모호했다. 그를 보는 것도 아니요, 마치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이봐!”     


묵철이 말을 거는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이 거칠게 열렸다. 휘는 재빨리 문 쪽으로 뛰어갔다. 뒤늦게 그가 그녀를 쫓았지만 이미 문이 그 앞에서 굳게 닫힌 후였다.


문을 닫은 뒤, 그녀는 문고리를 채찍으로 꽁꽁 묶어버렸다. 안에 갇힌 묵철의 고함이 육중한 철문에 먹혀 쿵쿵 진동처럼 울렸다.      


“정말 이리 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눈앞의 복면인을 보고 반갑게 말했다.

휘는 그의 기척을 알 수 있었다. 함곡관에서 건안성에서 늘 함께 했던 사람.


“이곳을 나갈 방법은 있소?”


지성이 복면을 벗으며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반드시 오리라는 기대는 걱정으로 번져갔다. 그가 지금 태평궁과 맞서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전하! 어째서....”     


오셨냐는 말을 차마 물을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어렸다. 반가움과 그동안 쌓여있던 서글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오.”     


지성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다. 휘의 검은 눈에 수많은 별빛이 움직이듯 떨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오?”     


휘를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흔들자 지성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안에서  묵철의 고함소리가 철문에 막혀 웅웅 거리고 있었다.      


“묵철을 저리 두어도 괜찮을까?”     


그가 철문을 노려보며 섬뜩하게 말했다.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그의 흔들리는 동공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화친을 청하러 온 자를 죽이시면, 태평공주에게 미끼를 던 저주는 꼴이니 아니 되십니다.”     


휘는 지성의 손을 이끌었다. 궁으로 어떻게 넘어 들어가긴 했지만 왔던 길을 도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혼자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혼자 오지 않았소.”     


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럼...”

“장소는 궁 내부를 살피고 나갈 거요. 우리만 여기서 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지성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함정을 보아온 그였지만, 도대체 이 미로는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날이 새길 기다려 태평공주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 팔괘를 만든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그대는 아는가 보군.”

“흑치 장군과 무천 사부가 만든 것입니다!”

“뭐라고?”     


그녀는 어리둥절 해하는 지성의 손을 잡고 가볍게 뛰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 뒤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과연 이 팔괘도를 알고 만들어 놓은 것일까? 모르고 만든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미로는 분명 흑치상지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길인 듯, 길이 아닌 숲이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졌다. 무턱대고 들어가다간 이 안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 죽을 수 있을 만큼 난해한 미로였다.      


그러니 지금까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각을 나와서 보니 그녀가 머물던 곳은 태평궁 바로 바깥에 있는 낡은 전각이었다. 궁과 연결된 단 하나의  은 경계가 삼엄했고, 팔괘는 이 전각의 경계처럼 둘러 있었다.      


이곳에 오는 이들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평생을 이곳에 갇혀 죽거나, 도망을 가다 미로에 갇혀 죽거나. 태평공주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악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오줌을 받아 마신다거나, 아이들의 피로 목욕을 한다거나. 장안에 떠도는 소문들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물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정말 나가는 길을 알긴 아는 거요?”     


지성은 빽빽한 대나무 숲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오면서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아무리 몸을 숨기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그 역시 이 미로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궁으로 통하는 문으로 그녀를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같으니.


태평공주는 이미 제가 궁 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황궁의 병력까지 총동원된 태평궁의 경계는 매우 촘촘했다.     


그런데,     

지성의 눈에 휘는 길을 보지 않고, 내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하늘을 뚫어지게 보던 그녀가 갑자기 냅다 뛰기 시작했다.      


“천, 천천히!”     


그는 차마 뛰지 말란 소리를 하지 못하고 그녀 뒤를 바싹 쫓았다.

바람처럼 빠른 그도 그녀가 뛰기 시작하면 잡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몸은 가볍고 날랬다.


한참을 뛰다가 멈춰서 하늘을 보고, 또 걷다가 하늘을 보고. 이것을 내내 반복했다. 그들은 지나는 길에는 간혹 끔찍한 광경을 봐야 했다.      


반쯤 썩은 시체라던가. 이미 백골이 되어 버린 어린아이의 시신이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치성의 눈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갈수록 숲은 음산해졌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그녀는 다시 하늘을 봤다. 그러고 나서 우거진 수풀을 들추면 바로 길이 나타났다. 길은 마치 산을 내려가는 것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 앞장서서 거침없이 숲을 헤치는 그녀를 보며 지성은 혀를 찼다.      


“지금 무엇을 보며 가는지 물어도 되오?”

“태백성입니다!”

“!”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팔괘도는 태백성의 궤적을 따라 만든 미로였다.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모양을 따서 숲을 나누고,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태백성의 움직임에 맞춰 길을 냈다. 말을 듣고 보니 길은 정확히 태백성이 움직이는 시간에 따라 팔괘에 길이 나 있었다.


도저히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태백성이 있는 방향에는 어김없이 작은 샛길 나 있었고, 작은 샛길들이 여럿 있는 곳에서도 별과 같은 방향으로 가면 길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밤새 미로를 걸어 동이 틀 무렵에서야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 미로의 출구를 보자 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성은 미로에서 나오자 그녀를 주작대로를 지나 동시(東市)의 한 객잔으로 데리고 갔다. 객잔은 동시(東市)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많고 북적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들고 나는 사람을 잘 확인하기 어려웠기에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들어갑시다.”     


왜 왕부가 아닌 객잔으로 가는 것인지 묻기도 전에 지성은 서둘러 그려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문이 굳게 닫히고 나자 어두운 방 안에서 휘는 꽤 익숙한 남자의 품 안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구하지 못하는 줄 알았소.”   

  

태평공주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휘는 지성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 쉬이 죽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지성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을 감싸며 가깝게 시선을 맞췄다.      


“몸은…. 괜찮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지성의 손에 뜨거운 열향이 올랐다.      


“졸음이 자주 쏟아지는 것 말고는 아주 멀쩡합니다!”

“하아.”     


지성이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그녀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모든 체향을 담을 듯이 깊을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으로 가는 내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오. 오늘 밤에 그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군사들을 이끌고 태평궁을 들이닥칠 작정이었소.”

“괵왕께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실 리가!”   

  

휘는 고개를 들어 지성과 눈을 맞췄다. 불안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제 손을 얹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음성이 격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의 열기가 그녀의 손이 닿는 곳에서 불처럼 솟아나는 것 같았다.      


휘는 지성이 이토록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세상 모든 이들이 분노해도 그에게만은 그 열감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내가 무모하지 못했기에 그대가 이렇게 당하는 거요!”     


지성은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휘는 그의 가슴에 파묻히듯 기댔다. 어둠 속에서 조금 전 그녀가 있었던 전각과 그 주변의 팔괘도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쯤 태평궁은 발칵 뒤집혔으리라. 저를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던 태평공주의 얼굴이 떠올렸다.      


“어쩌면, 당한 것은 제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휘는 그의 가슴에 꼭 안기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태평공주라지만 그녀도 모르는 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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