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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Apr 01. 2021

#49 날으는 불꽃

- 낙인 -

“대체 무슨 소란이길래 이리 허둥대는 것이냐!”     


가뜩이나 예민해진 태평공주의 좁은 미간에 흉한 주름이 접혔다.      


“객성이 떨어졌다 하옵니다!”

“객성?”     


객성이 서쪽에서 출몰하여 태미자리에 잠겨들었다. 

하필 이럴 때에 출몰한 객성이 반가울 리 없었다. 태평공주의 낯빛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심 반기며 길한 징조라며 입을 모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태평공주 그녀만은 웃을 수가 없었다.      

“객성은 오래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펼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제성의 자리에 머물렀으니 이는 응당 태자가 천자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황제가 청한 별을 보는 술사의 말은 정국 변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아귀가 들어맞듯 하나부터 열까지 태평공주 그녀에게 모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는 더이상 제 눈물에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돼! 왜! 하필 지금인 건데!”     


그녀는 정전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계속되는 재해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과 달리 공주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정이 궁핍해져도 그녀들은 마을을 없에 도관을 짓고, 향락을 즐겼다. 태평공주는 세간의 민심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다 제 발 아래에 있으니 그들이 품는 불만 또한 그녀의 아래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밤새 불꽃이 날았다 합니다."


날으는 불꽃?  

문득 부여 휘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속을 스쳤다.     

 

‘다! 그년 탓이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질때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독초처럼 돋아나 그녀의 이성을 지배했다. 

그녀와 마주칠때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독을 먹여도 죽지 않으니, 마치 불사의 존재처럼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났다. 두려움. 부여 휘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어디선가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고작 멸망한 나라의 보잘 것없는 공주일 뿐인데.’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라 여겼다. 

괵왕비라니, 안 될말이다. 수많은 귀족 가문을 마다고 지성은 그녀를 선택했다.     

이 시점에 황제가 태자에게 양위를 선포한다면. 


아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아비가 아들과 권력을 나누려 한다는 말인가. 

이 일로 태자가 황위를 노리는 것이라 몰고 간다면 분명 황제의 생각도 변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큰 착각이었다.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황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의 입에서 더 많은 말이 나오기 전에 조정의 많은 사봉관들과 태평공주는  황제의 생각을 돌리려 애를 써야 했다.      


“전하, 분명 객성의 출몰이 길한 징조이나 이는 폐하의 자리를 넘보는 간악한 무리배들에게는 

좋은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이옵니다!”     


태평공주가 말하는 간악한 무리배라면 분명 태자와 그 측근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이 말을 들은 태자는 급히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의 미미한 공로로 인하여 형님을 제치고 태자가 된 것도 큰 죄이온데, 폐하께서는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아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사직이 다시 편안해진 까닭과 내가 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너의 힘이이 아니었느냐! 객성의 출몰이 과거 묵은 것을 없애려는 징조라면 나는 기꺼이 너를 위해 이 자리를 내어 줄 것이다!”     


황제의 오랜 기다림의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아직 황제께서 이리 정정하시거늘, 오라버니께서는 태자가 불효를 하길 바라시는 지요!”     


태평공주는 마지막까지 오라비인 예종의 옷자락을 붙들며 애원했다.      


“불효라! 그렇다면 너는 내가 죽으면 태자를 보위에 올려주려느냐?”

“폐하! 어찌 이 못난 동생에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태평공주는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풀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오라버니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제가 조카를 도와 사직을 바로세운 것을 하늘도 알고 땅이 아는 일이옵니다.”     


그녀는 억울 한 듯 울먹였다. 금세 큰 눈에서 유리알 같은 맑은 눈물이 솟아났다.

제 사람들을 관직에 올리고, 재상을 만들었던 눈물. 태평공주가 흘린 눈물은 그 어떤 보석이나 진주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읊었던 시인의 말은 진실이었다.      


 양위에 대한 황제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제 더는 늦어서는 안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영월아! 너는 승려 혜범의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     


청천벽력같은 말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느닷없이 황제의 입에서 혜범이란 말이 나오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백련사 주지를 황제가 어찌 안단 말인가.      


“낙양의 비옥한 전답이며, 상가들이 모두 헐값에 팔려나간다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혜범이라니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옵니다. 폐하!”

“너와는 정녕 아무 상관이 없느냐?”     


그녀를 보는 황제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갔다.      


“황,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럴테지!”     


 양위를 논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혜범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당황하는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허를 찔린 기분,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앞으로의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그녀를 휘감았다.     

고개를 들어 황제를 마주했으나 여느때와 달리 싸늘하게 식은 황제의 얼굴이 앞에 있을 뿐이었다. 언제든 제 말을 들어주던 마음 따듯한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느냐?”     


황제의 조소어린 물음에 좌중이 술령였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보여야 할 사람이 없었다. 양위를 논할 때마다 제일 먼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 제 잘못을 빌어야 할 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단단히 틀어지고 있었다. 




 명광현의 하늘 연못은 늘 안개가 자욱했다. 못을 가득 메우던 하얀 수련은 모두 시들어 매마른 줄기만 고개를 물에 처박고 있었다. 그조차 아련하고 신비스러운 풍경. 


사르륵, 비단이 풀을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울수록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개가 걷히며 길이 열렸다. 군데 군데 드러나는 작은 봉분들. 

지난 시간동안 몇 개의 붕분이 늘어나 있었다. 

     

 그 봉분들 사이로 여인의 치맛자락이 스쳐 지났다. 인사를 하듯 무덤의 풀잎들이 바르르 떠는 것 같았다. 점점 수풀이 우거지고, 거칠고 억센 가시밭을 지나자 낡고 허름한 봉분들이 모여있는 풍경이 여인의 눈 앞에 펼쳐졌다.      


여인의 발길이 그곳에서 멈췄다. 


그녀의 몸은 그믐달을 품은 듯 부푼 배를 안고, 폐허가 된 무덤 앞에 섰다.      


“오랑캐의 자식이라 미워 하시렵니까?”     


말끝을 잇는 휘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제를 멸망시킨 적국의 사내를 마음에 품고, 그 아이를 배태했다. 

나라를 지키는 신물은 마지막 부여씨를 죽이는 저주가 되고. 

끝까지 지키려던 신념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원념이 되어갔다.       


“그리 미워 저를 데려가려 하셨나이까?”     


맑고 청량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고 지났다. 마치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처럼.      


“이 아이도 어라하의 자손이니 지켜주소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밑으로 구슬처럼 맑은 물방울이 굴곡을 따라 턱 끝에 이슬처럼 매달렸다. 자욱하던 안개가 걷혔다. 멀리서 두 남자가 그녀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휘는 뒤에 선 사타무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금빛 왕의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직접 돌려드립시시오!”     


귀걸이를 떼어 버린 사타무의의 모습은 오만하고 건들건들한 명광현의 장주가 아니었다. 

낙양에 사는 여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공자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무심히 손을 뻗어 그녀가 주는 제 물건을 마치 처음 보는 물건처럼 어색하게 내려 보았다. 


“직접...”     


 매사에 자신있어하던 사람은 사라지고. 받아든 귀걸이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 눈에 무척 낯설었다.      


“이 물건의 주인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차가운 휘의 목소리에 사타무의는 잠시 침묵했다.      


“저를 미워하시는 군요.”     


사타무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또한 공주님의 백성입니다.”

“백성이라?”     


휘의 한쪽 눈썹이 불편하게 치켜 떠졌다.      


“백성은 모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으며, 대부분이 이기적이고, 간혹 이타적인 이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왕을 끌어낸 이는 단 하나였지!”


휘의 말끝에 칼을 매단듯 날카로웠다.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백성이 아닙니까? 그 왕과 함께 끌려온....”

“여기에 있는 이들이!”     


휘는 소리를 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잠자코 있던 지성이 그녀의 옆에 섰다.      


“이곳에 잠든 이들이 이기적이어서 여기에 묻힌 줄 아느냐?”     


사탄무의는 눈 앞의 봉분들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어떤이들은 아는 얼굴이었고, 대부분은 자신이 명광현에 오기전에 죽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나라가 망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변명치 마시게. 물론!”     


휘의 음성에 사타무의는 눈을 감았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곳까지 와서 나오는 말이 모두 되도 않는 변명이라는 것을. 왕을 팔아 떵떵거리며 사는 제 집안을 멸시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본인이었기에.     


“그 모든 것이 자네 잘못이 아니니...”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붙들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귀걸이를 꽉 움켜 쥔 사타무의는 물끄러미 폐허가 된 왕의 무덤을 보았다.  

    

“이 귀걸이가 어라하대신 받은 죄의 무게라 하셨지요. 왕이 나라를 지키지 못해 제 백성과 장수들을 희생시킨 대가.”     


고종은 얄궂고 심사가 뒤틀린 자였다. 

낙양까지 왕을 끌고 온 예식진에게 전리품처럼 내려진 하사품. 

이는 그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예식진은 왕의 귀걸이를 받고, 통곡했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으며, 사타무의 아비에게도 유언으로 남겨 죄를 잊지 않게 했다. 그러나 가문에 죄의 표식을 대대로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람은 본부인 정씨였다. 정씨는 남편이 죽자, 이 가보를 고구려 부인의 소생인 예현에게 주고 그를 쫓아냈다.      

그의 앞에 폐허간 된 무덤을 보며 사타무의는 탄식했다.      


“이제야 뵙습니다! 그토록 소인을 보기 싫으셨습니까?”     


명광현으로 돌아와 수도 없이 올라왔다. 그러나 정작 왕의 무덤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꽁꽁 숨어 버려 자취를 감추듯이 눈 앞을 가린 안개는 길을 열지 않았다.     


“나머지 한 쪽은 영영 돌려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사타무의는 그대로 돌아서 하늘연못을 떠났다.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서 나가는 그의 뒷 모습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그제야 휘는 그를 보는 자신의 시선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사람의 본 외양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이 귀걸이 하나로 저 또한 그를 왕족을 건드린 천에 몹쓸 역적으로 그를 대해 왔던 것이었다.      

이는 낙인이었다. 


역적의 낙인.      


왕을 호위했던 예식진은 제 가문을 역적의 가문으로 낙인을 찍음으로서 의자왕의 죄를 나누어 지었던 것이다.      

“몸이 상합니다. 우리도 내려갑시다.”     


멍하니 걸어가는 사타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녀를 보며 지성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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