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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31. 2021

#48 죄악의 무게

- 몰락의 시작 -

촛불이 일렁이는 빛을 따라 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언제부터 계시었습니까? 기척이라도...!”     


휘는 하던 일을 멈추어 서둘러 일어났다.

지성은 일어나려는 그녀를 도로 앉히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크고 맑은 검은 눈망울, 군살 없이 매끈한 이마와 선명하게 굴곡진 콧날. 촉촉하고 야무지게 부푼 선홍색 입술. 그녀의 긴 목을 따라 내려 가던 그의 시선은 작은 바늘에 이곳 저곳이 뚫린 그녀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휘는 무릎 위에 작은 베넷 저고리를 자랑스럽게 그 앞에 펼쳐 보였다.      


“너무 작지 않습니까? 아무리 물어봐도 이것 보다 크면 아니된다 합니다.”     


그는 제 손바닥 만한 아이의 옷을 만지작 거렸다. 고른 바늘땀은 아니었으나 한 눈에도 정성이 들어간 손길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느질은 잘못 된 선택 같은데...”     


지성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휘의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피어올랐다.      


“뭐든 처음부터 잘 하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언젠가는 활을 쏘는 것 만큼 바느질도 늘겠지요.”     


서둘러 지성의 손에서 앗아든 저고리를 붙들고, 그녀는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지성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베넷저고리를 보는 지성의 눈빛이 처연하게 굳어 갔다. 그녀의 손길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 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피가 아이의 옷을 적시고,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휘의 얼굴에까지 번져갔다.      


‘네 어미는 너로 인해 죽은 것이다!’

‘아내를 죽여 목숨을 부지하더니, 이제는 자식까지 잡아먹겠군!’     


수근거리는 듯한 이명이 머리 속에서 날뛰었다.      


"전하!"


찰나의 순간, 마치 한바탕 꿈을 꾼 듯했다.

휘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 난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걱정스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 불안하십니까?”     


그녀는 지성의 얼굴을 보며 애써 어두운 그림자를 지워냈다.      


“걱정하지 마시오!”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휘였다. 태평공주와 맞서고 있는 지금, 또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해졌다.

때문에 그의 앞에서는 웃어야했다.      


“비굴해지지 마십시오! 당당히 전하의 걸음을 가시면 됩니다.”     


휘의 말은 언제나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주저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일으켜 등을 떠미는 여인이었다.     

 

“먼저 장대인을 만나뵈야겠소.”

“지금 이런 시기에 더 태평공주를 자극하지 마소서.”     


 후궁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저 좋자고 받은 각서였으나, 그렇게 쉽게 써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다. 어차피 정치적으로도 황족은 후궁을 들이는 일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런 때이기 더더욱 태평궁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소.”

“태평공주도 전하께서 이리 나오실 것을 예상하였기에 화영을 선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휘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엇으로 태평공주를 상대할까. 양위는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으나 적절한 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황상의 마음을 이미 간파한 태평공주는 마치 그물처럼 촘촘하게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고, 태자의 세력은 점점 더 위축되어갔다.    

 

모두가 황제 위의 태평공주가 있음을 알았고.

태자의 폐위를 입에 올리는 것에 어려워 하지 않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새로운 여제의 탄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저와의 약속 때문이라면 크게 개이치 마시어요.”     


 휘는 몹시 개면쩍었다. 모두 저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옷에다 지장 따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저 남자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 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왕비가 후궁을 반대한다니. 이는 장안에서도, 낙양에서도 웃음거리만 될 뿐. 하등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쪽 구석이 찬 기운이 밀려드는 것처럼 서늘해지는 것을 막을 길은 없었다.

지성은 품에서 반짝이는 귀걸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것은....”

“사타공에게 받았으나, 원래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겠소?”     


그녀는 그의 손에 들린 빛나는 물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이것을 맡겼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렇군요!”     


헛웃음이 나왔다. 한때는 빛나는 제국, 왕의 물건이었을 이 물건이 이제는 누군가의 죄의 무게로 취급되었다. 나라의 안녕과 선조들의 안식을 비는 향로가 저를 죽이는 비수로 변해 버린 것처럼.      

눈부신 미소와 함께 빛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이 귀걸이를 빼버린 그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을 했다.     

 

“당신은.....”

“그를 믿어보려고 합니다.”     


지성은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여겨도 무방했다. 쉬이 누군가의 사람이 되기 힘든 인사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타고난 감각이 있더군.”

“그게 무엇입니까?”

“저무는 기운을 빨리 감지한다는 것이오라오.”

“저무는 기운....”     


 그녀는 씁쓸한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저무는 기운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하나였다. 부여 경. 그는 온전히 유민들을 지키지도 못했고, 완전한 대방군이 되지도 못했다. 망국의 기운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또한 저에게도 있는 것.


“누구보다 태평공주와 가까웠던 자니...”

“배를 갈아탈 준비를 하는 것이겠군요.”

“바로 그거요.”


그녀는 사타무의의 귀걸이를 찬찬히 살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서글픔이 울컥 올라왔다. 누군가의 선택으로 흥한 자, 누군가의 선택으로 망한 자, 예씨는 왕을 볼모로 가문을 얻은 대신, 이 왕의 유품으로 하여금 죄의 무게를 함께 짊어 지게 했다. 그가 지고 있을 마음의 무게는 얼마만큼일까.      


고종은 고약한 성격을 가진 자가 분명했다. 받들던 왕을 끌고 온 군신에게 그 왕의 유품을 상으로 내리니. 이것이 무얼 뜻하는 것이겠는가.      

문득, 그가 어떤 결심을 했음을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제 그의 미소는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휘는 속으로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녀는 남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지성이 따뜻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청량한 풀내음이 그녀의 머리를 싸고 돌았다.      


“그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오.”     


품에 안아든 그녀를 안고 지성은 주문처럼 되뇌였다.  


    



어느덧 더운 계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낙양은 꺼진 불빛처럼 조용하고, 적막이 듫끓고 있었다. 이 부풀대로 부푼 폭탄밭에 불씨하나만 던져진다면 거침없이 타오를 것처럼 세상은 어둡고 흉흉했다.      


712년 경운(景雲) 3년     


유주대도독 손전은 좌교위장군 이해락과 더불어 군사 2만과 기병 8천명을 발동하여 해와 거란을 습격하였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      


“소상히 고하라!”     


황제의 낮은 목소리가 대명전을 흔들었다.      


“유주도독 손전을 포함한 군사 이만과 기병 팔천이 모두 전사하거나 흩어져 돌아이는 좌교위 이해락과 오장군 뿐이었사옵니다!”     


올라온 상소를 내관이 따라 읽자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사로운 보복성 전투였다. 황제의 의가를 받았으나 그들의 뒤에 태평공주가 있음을 다 아는 일이었다. 그 저변에는 태자를 몰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처음에는 모두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듯 했다. 그러나 해와 거란은 당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 세력이 훨씬 드셌으며, 손전이라는 위인이 공명심에만 눈이 멀어 아래의 오장군의 만류에도 어거지로 출병한 것이 문제였다.


거기다 길이 험준하고 곡식도 익힐만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계절이었다.      

해족의 추장은 이들을 살려 묵철에게 보냈다. 그러나 묵철 이들을 살려두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무려 군사가 이만 팔천이거늘, 어째서 군사를 죽이고 장군이 살아돌아왔는가!”     


이해락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폐하! 섣불리 전장에 나간 이들을 목을 베셔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잠자코 있던 태자가 나섰다.      


“감히 유주 도독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황제의 의가가 있었다 하나, 해와 화친을 꾀하는 중에 먼저 도발을 하였으니, 그 죄는 면하기 어려울 테지요!”     


황제가 태평공주에게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말 하지 않고 있던 그였다.

이융기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정의 대신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태자의 언행의 끝이 저들을 너머 누군가에 향해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태자의 눈길이 서서히 어사대부 두회정에게 향했다.

그는 간신히 침을 삼키며 어서 이 자리를 벗어 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묵철이 왜 손전도독을 죽였을까요?”     


대명전에 죄인처럼 부복해 있는 이해락은 온 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묵철!     


‘내가 너희를 살려주는 이유를 똑똑히 들어라. 그 오만한 당나라 공주의 얼굴에 꼭 참상의 쓴맛을 보여 주고 싶단 말이다. 크하하하!’     


무섭게 살떨리는 경고였다. 군사 이만이 다 무엇인가. 당나라 군대는 이미 쓸모없는 오합지졸이었으니, 어차피 이 전쟁은 손전의 착오였다.      


“이대로 묵과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황제폐하!”     


이융기는 황제 앞에 나섰다.      


“이는 나라의 근간인 부와 병이 썩었으니, 이를 바로잡을 다시 없는기회이옵니다!”

“농민들의 군역을 줄이고, 사사로이 전답을 독점하는 폐단을 막기위해 토지를 다시 재정비 해야 할 때이옵니다!”     


갑자기 주변이 술령였다. 군사개혁과 토지개혁을 한 번에 내뱉은 태자의 말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쨍그랑!”

“마마!”     


사정없이 물건을 부수는 태평공주와 그를 말리는 시녀들의 실랑이가 한참이었다.      


“내 이놈을 살려두지 않으리! 묵철 네 이노옴!”     


아무리 소리쳐 봤자. 장안에서 수천리길 떨어져 있는 묵철에게 닿을 까닭이 없다. 나름 이번 전쟁에 기대를 걸었던 그녀였기에, 손전의 참패는 그녀에게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번 전쟁만 승리로 이끌었어도, 태자에게로 넘어가는 군사력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었다. 분노로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이를 계기로 제대로 꼬투리가 잡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백련사 혜범과 도관을 무리하게 짓는 공주들의 사치스러운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들이 대명궁에 빗발쳤다. 어사대부 두회정은 재빠르게 사직을 청하고 포주로 숨어 버렸고, 그녀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나란 말이다. 이 태평을 도대체 뭐로 알고 있는 것이야!”     


어차피 도망가는 이들은 권력에 따라 철새처럼 떠도는 무지랭이들. 이번 일만 넘어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앉아서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쿵!쿵!쿵! 소리나게 달려온 시비가 그녀의 방을 벌컥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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