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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31. 2021

#47 여우몰이

사방에 어둠이 깔리자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가 왕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왕부의 넓은 회랑으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은밀한 방 안에서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지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가 망토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의 귀에서 반짝이는 귀걸이였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내가 그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성의 물음에 사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저는 명광현의 장주 사타무의가 아니겠습니까?”     


지성은 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자 그럼 이렇게 야심한 밤에 나를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     


지성은 서 있는 사타무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지성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언제나 낙양의 화제의 중심에 있던 황족 이지성. 지난날, 왕부 앞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넘처났고, 그와 혼약을 맺기 위해 귀족들은 여기저기서 줄을 댔다.      


중종과 태평공주의 사랑을 받았고. 죽은 위황후마저 탐내던 사내가 아니던가.      


“지난날처럼 태평공주의 꼭두각시로 나를 찾아온 것인가?”     


사타무의, 그자는 태평공주의 수많은 정인 중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인보다는 서로 필요에 의해 거래로 맺어진 사이. 언제든 깨어 저도 이상하지 않은 얄팍하고도 무의미한 관계. 


그 대가로 태평공주는 사타무의의 귀걸이를 가져갔다.      

사타무의는 지성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명광현은 건안성의 사람들이지요. 태평공주도 괵왕의 사람도 아닙니다.”     


여전히 건방진 자다. 지성은 사타무의의 오만한 말투에 고개를 저었다.      


“쉰소리는 그만두고 왕부에 온 용건은?”

“혜범을 잡을 수 있게 돕겠습니다.”

“원하는 것은?”

“저를, 명광현을 놓아주십시오.”

“놓아달라?”     


명광현은 낙양에 볼모로 있는 유민들의 대장간. 사비에서 끌려온 이들은 모두 그 명을 달리했고, 현재 남은 이들은 그들의 후손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쓸쓸 홀로 죽어간 이들도 많았다. 그나마 명광현이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노의 힘이 컸다. 

그러나 명성은 남아 있으되, 여전히 볼모인 그들.      


“그리해주신다면, 혜범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지요!”     


지성은 사타무의의 놓아달라는 말을 잠시 곱씹어 보았다. 명광현은 낙양에서도 꽤 잘 나가는 대장간 마을이었다. 비록 볼모이기는 하나 황성과 묶여 있기에 보장되어 있는 삶. 

그러나 그의 눈은 또 다른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장주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지성은 사타무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라는 그저 돈을 위해 건너는 다리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사타무의는 저를 향한 지성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않았다. 


“돈을 바라는 것이라면 지금의 위치가 그리 나쁘지 않은것 같은 데 말이야.”

“나라는 돈을 위한 다리일뿐이지만, 나의 나라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의 이 나라는 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벗어나고 싶다?”

“그러하옵니다.”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하지 마소서! 그 또한 저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선택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지성은 궁금했다. 단 한번도 선택을 스스로 해 본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그였다. 

그저 황족으로 태어나 앞에 놓여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뿐.      

지성은 다시 를 떠올렸다. 

모든 순간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였던 여인. 


“선택할 수 없는 이에게 선택은 무의미한 것일 수 있으나…..”     


사타무의는 지성을 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에게는 볼모와 볼모가 아닌 삶이 있지 않겠습니까? 조부께서는 왕을 버림으로서 유민들을 지키셨고, 의자왕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유민들을 지키셨지요.”     

“그렇다면 자네의 선택도 유민들을 위한 것인가?”

“저는 비마마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선택은 그저 이 귀걸이를 떼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타무의는 손을 들어 제 귀에서 화려한 금붙이를 떼어 냈다. 구름이 흐르는 듯한 물결은 흔들릴때마다 사방에 빛이 흩날리며 퍼졌다.  그의 얼굴에서 귀걸이만 떼어 냈을 뿐인데. 사타무의의 얼굴은 기존에 보았던 사람과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반듯한 이마와 외커풀의 가늘고 긴 눈 안에서 그의 검은 눈동자는 차분하고 이지적으로 빛이났다. 


모든 죄악이 사라진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을 없애주길 바라는 것인가?"     


사타무의의 귀걸이를 받아든 지성의 손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그가 느꼈을 무게는 고작 이 금덩이가 아니었을 테니.     


“이제와 숨길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의 꿈은 발해였다. 영주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려는 그의 뜻을 흠모했다. 망국의 왕을 앞세워 계급을 얻은 가문을 저주하였기에 여기서 벗어나 살수만 있다면.      


 원래 부여씨의 뿌리는 사비가 아니였다.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옛 부여의 땅, 북방의 차가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부여 휘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마지막 부여씨의 적통 혈족. 지금 발해를 일으킨 대조영과 부여씨가 다시 합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나라를.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여씨의 마지막 왕을 끌어낸 예씨가 그 성을 버리고 다시 부여씨를 일으킬 수 있다면. 제 귀에 걸린 죄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저만의 착각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하나의 동류이나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혈족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은 여러민족이 합쳐질 수 있기에 대국이 되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애초에 하나가 될 수 없었기에 망한 것이겠지요.”     


사타무의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와 비의 혼인을 그렇게 반대를 했었군.” 

“그랬습니다. 어차피 괵왕의 자리는 불안하고, 공주께서는 아무 배경이 없으니, 위태로운 자리가 아니더이까?”

“지나치게 솔직한 것도 병이네.”

“송구합니다.”     


지성은 한숨을 돌렸다. 지나치게 정곡을 찔린 탓이다. 지금의 태자가 정변을 일으키고, 황제가 태자를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저 역시 왕비를 잘 지켜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족이라는 허울따위, 권력의 이용감에 불과한 빈 껍데기.      


“아무튼, 난 그대 뜻을 존중하지. 그렇다면 앞으로 계획은?”     


사타무의는 지성의 말이 끝나자. 그 옆에 있는 탁자로 성큼 다가가 소매에서 피륙으로 만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낙양성 전체가 그려진 지도위에는 황성과 바둑판처럼 그어진 각 방의 위치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붉은 색이 칠해진 곳이 군데 군데 보였다.      


“낙양의 남시는 비록 낙수와 가까워 외부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황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음. 그렇군!”     


 사타무의의 설명은 이러했다. 

서시가 육로와의 교통이 활발하다면, 남시는 낙수를 이용한 수로에 의한 교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따라서 군사적 요충지로서도 남시보다는 서시의 상권이 좀 더 발달한 것도 사실이었다. 

태평공주는 이 서시의 상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홍수 피해로 남시는 서시에 비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물자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남시의 대부분이 서시의 상인들에게 먹혀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 백련사 주지 혜범이 있었다.      


“혜범은 불공을 이유로 전답과 돈을 거둬들이고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태평궁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민심이 흉흉한 이유가 고스란히 사타무의가 가져온 지도안에 그려져 있었다. 

혜범을 통해서 절로 들어간 거액의 시주금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태평공주의 수중에 쌓여갔다. 조정에서 아무리 조세를 줄이고, 구휼을 한단 한들,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라의 세금은 돌고 돌아 결국 태평궁의 곳간을 차곡차곡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혜범을 탄핵하는 상소를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타무의가 운을 때자.      


“흥! 상소를 올린들 들어주실 수 있는 폐하가 아니시네.”     


재상을 하나 임명하는 것에도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황제를 뒤흔드는 여자였다.

혜범에 대한 탄핵에 그녀가 어찌나올지 보지 않아도 아는 일.     


“그렇다면?”

“때를 기다리셔야지요. 성난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 모두가 그를 지목할 때, 그 때 마지막 한 방!”     


사타무의는 지도가 펼쳐진 탁자 위에 한 손을 탁! 하고 내리쳤다. 

지금상황만으로도 내일 당장 민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이 퍽퍽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사타무의는 두루말이를 두 손으로 탁 접으며 말을 이었다.      


“변방에서 전쟁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그 시기는 더욱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지성은 벌떡 일어났다.      


“전하께서도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해와 거란은 다시 처들어 올것입니다.”     


해와 백습은 원래 작은 부족 국가였다. 

이들을 규합하고 일으켜세운 것은 돌궐도 아니고, 토번도 아닌 바로 거란이었다.      

북방의 막강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작은 부족국가들이 서로 뭉치면서 패권을 다퉜다. 

당은 토번과 돌궐의 침입때문에 발해의 건국을 막지 못했고, 거란이 세를 키우는 것을 방심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번 겨울이 되겠군!”

“그러합니다! 허나! 태자께서도 괵왕전하께서도 이 전쟁에 참여하지 마소서.”

“흠! 참여하고 싶어도 못하겠지.”     


그의 말처럼 태평공주는 태자의 우림군과 만기군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여 일찍이 황제를 통해 제서하였으니. 이미 태자의 병력은 황궁안에 가둔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괵왕의 후궁으로 화영을 들임으로서 괵왕부에도 자신의 눈을 심으려 한 것이다.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격이군!”


지성은 소리없이 웃었다.     




한바탕 세찬 비가 물러가고 나뭇잎마다 물방울을 가득 머금고 있는 오후,

백목당에서는 휘와 그녀의 시비들이 한참 무언가를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마마! 그냥 소인이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찬비가 바늘을 손에 쥔 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합니다. 근심은 만병의 원인인데 이리 고생하시다 몸이 상할까 저어됩니다!”     


홍비도 찬비의 말을 거들며 말렸다. 

두 시비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휘는 바늘을 손에서 놓치 않았다. 이미 그녀의 손가락은 이곳저곳이 찔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었다.      


“어미가 되가지고, 자식의 배넷저고리 하나 만들지 못한다면 너무 창피하지 않느냐!”     


휘의 검은 눈은 금새 눈물이 차오를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울상짓는 그녀를 보며 홍비는 소리죽여 웃었다.      


“못하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서투르시니 그렇지요!”     


소리 죽여 웃는 홍비를 있는 힘껏 째려보며 찬비가 휘를 위로했다. 

하얗고 반듯한 미간에 근심의 주름이 생기고, 한땀 한땀 집중하는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정적이 길어진 느낌에 고개를 드는 데, 저를 어여뻐 죽을 듯이 내려다보는 지성의 눈길과 맞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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