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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29. 2020

#35 후궁은 들이지 않겠소

당의 수도, 장안은 낙양과 마찬가지로 용도에 맞게 구획된 계획도시였다. 

중앙의 황궁을 중심으로 바둑판으로 나누어진 도시의 각 구역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는데,  주작 대가의 동쪽에 위치한 평강방, 북리 일대는 기루 밀집 지역이었다. 

     

평강방의 월루,      

황궁과 가깝고, 고관대작들이 주로 다니는 이 고급 기루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기루는 둥근 원형형태의 이 층 건물이었다.      

중앙에는 둥근 무대가 있었고. 무대 주변에 둘러싸인 연못에는 붉고 하얀 비단잉어들이 떼지어 몰려다녔다.      

무대에는 무희들이 춤을 추고, 그 무대와 가장 가까운 넓고 화려한 정자에는 태자 이융기와 괵왕이 된 지성. 그리고 원진이 함께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태복경!" 

    

활짝 웃는 낯의 융기와 달리 원진의 얼굴은 내내 어둡기만 했다.

      

"태자 전하와 괵왕전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의 나의 이미 서른 중반을 넘고 있었다.

전장에서만 살아왔기에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지성은 맑은 눈동자를 들어 그에게 웃어 보였다.

 

“철없는 누이의 행동을 어찌하면 좋을지….”


지성을 보는 원진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유모는 제게 은인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허나! 더는 왕부에 두는 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전쟁터에서 호령하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리고 두 남자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쩔쩔매고 있었다.

      

"오라비 된 처지에서는 전하께서 거두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사오나!"

"그건 불가합니다!"

     

원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성의 단호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


원진의 말에는 아쉬움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이융기는 그 둘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 그 때문에 두 분을 뵙고자 했습니다." 

    

지성은 결심이나 한 듯이 태자와 원진을 보며 말했다.

      

"유모께서 그간 왕비를 대신에 왕부의 살림을 도맡아 해왔사오나." 

    

이융기가 슬며시 술잔을 들고 일어나려는 것을 지성이 쏘아보는 눈빛으로 붙잡았다. 

원진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원! 지금 이 자리가 곽장군 벌을 세우려는 자린가? 자네도 너무 하는군."

"태자께서도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도망가려던 이융기는 슬며시 다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월루에 와서 이렇게 재미없는 술자리는 처음이네! 어쩐지 잘 따라온다 했더니만."   

  

지성은 웬만해서는 기루에 얼굴을 내미는 남자가 아니었다. 

왕부 주변에 넘치는 것도 모자라 기녀들까지 주변에 모여드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무대가 비었음에도 그들을 중심으로 기녀들과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단연, 그 시선의 중심은 괵왕 이지성이였다.      

장안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받는 남자. 아내를 죽이고 왕부로 돌아 온 황족. 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다양했다. 


한참 기루에서는 얼마 전 있었던 건안성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갑옷을 입고, 검을 든 모습이라니.  여인들은 부채 뒤로 속삭이며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지성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히 돋아났다. 

원래 기루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 원진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이융기는 재밌는 얼굴로 술잔을 홀짝이며 그들을 힐끔거렸다. 

     

"저는 왕부에 비 외에 여인은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태자의 손에 들고 흔들던 술잔이 멈추고,

원진은 얼굴을 들었다. 

지성을 보며 소란스럽던 기루가 삽시간에 침묵으로 조용해졌다.

      

"지금 그 말이 참이더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융기가 지성에게 다가왔다. 

     

"어허!"   

  

그는 진심으로 지성을 걱정했다. 

 아내를 죽이고 산 사내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수도 최대 방어군이라는 병력은 중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  그리고 태자 이융기와 황제에게 끈을 대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괵왕부에 혼서를 넣고 있었다.    

  

 "후궁은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괵왕부에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니?"

     

이융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월루의 모든 사람들, 특히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건 좋은 생각 같지 않군."


이융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태자와 황제쪽으로 붙으려는 사람들.

태평공주와 태자를 놓고 저울질하는 사람들.   

  

정변으로 권력 위에 앉은 태평공주와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선 태자.


그는 조정에서 태평공주에게 밀리는 만큼 군사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했다.      

그 또한 지성이 선왕들처럼 줄줄이 후처를 들일 거라고는 짐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 외에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황실 혼인이 사사로운 일이더냐!"

"사사로웠다면 지금까지 제가 했던 정혼과 파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이융기는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괵왕부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양쪽 세력을 견제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태평공주와 세력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좌 우림 군과 수도방위군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었기에, 역대 괵왕들은 후궁을 들이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제가 다시 원하지 않는 사람을 들이길 바라십니까?"   

  

그의 한 마디에 이융기는 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숭국부인 위 씨와의 혼인.     

누구보다 대쪽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게다가 아무리 태자라 해도 지성에게 그 무엇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동안 그가 지성에게 저지른 일들이 너무 많았다. 

     

"왕실 가문을 위해서라도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더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네 말뜻은 알겠으니, 천천히 생각하자."

"말씀을 바로 하십시오! 아내를 죽여 목숨을 부지한 이에게 기어이 아내를 이용해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문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태자에게 대거리하는 사람은 대당에서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옆에서 보는 이들에게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대화가 오갔다.   

   

태자를 건드렸으니, 고성이 오가거나 칼부림이 이뤄질 거라 예상했다.      

혹은 어디선가 태자의 우림군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걸 짐작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이융기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다시 술잔을 들고 슬금슬금 뒤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지성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며 제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원진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태자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원진은 지성을 끌고 월루의 깊은 내실로 자리를 옮겼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전하!"


내내 고개를 숙이고 궁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원진은 본래 모습을 찾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씀하십시오."    

 

태자 이융기가 있는 곳에서 다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얼마 전 태사부께서 큰 변을 당하실뻔했습니다."

"지금 위안석 어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최근 태평공주는 사위와 친분이 있는 태소보 위안석을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법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태평공주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화근이 된 데다, 얼마 전 황제에게 태평공주를 믿지 말라는 직언함으로써 그녀의 눈 밖에 나버린 것이다. 결국, 태평공주는 태자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서 조사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마침 이 모든 일이 그가 태평궁에 들렀을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원진은 간신히 공주를 설득해 위안석을 궁에서 끌고 나왔다. 

     

"지금 태자 전하께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성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태평공주는 포주에게서 돌아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정의 인사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제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 어떻게든 해코지했으니 가뜩이나 불안한 조정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어수선했다.    

  

"그래서 소인의 생각으로는……."     


원진은 주저했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그냥 변방에 앉아 있을 때가 차라리 편했을 일. 

     

"태자 저하의 사람들을 잠시 조정에서 피신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왜 태자 전하께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를 태자께서 직접 폐하께 고하는 것보다 전하께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지성은 한때 중종의 좌습유였다. 

습유, 황제 측근에서 직접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자리였기에,  원진은 지성이 누구보다 그 역할에 맞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가 다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 미숙한 누이는 부디 왕부에서 내쳐주시실 간곡히 바라옵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곽 씨 집안의 영애.

말은 그러해도 누이에 대해 애틋함과 미안함이 있는 것을 지성은 알고 있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     


원진은 저를 따라 토번과의 전쟁에서 죽은 무진의 남편을 떠올렸다. 

차마 누이에게 고개조차 들지 못해 변방으로만 돌며 살아왔었다.      

아무리 무진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제가 있는 곳까지 흘러들어와도 그는 모른 척했다. 

     

"태복경께는 무척 송구한 일이지요."

"아닙니다! 모두 모자란 제 누이 탓이오니 전하를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할 말을 마친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모두 털어 낸 듯 편안했다.      


 



‘괵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성의 말은 평강리를 중심으로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갔고, 온 장안의 화젯거리로 들썩였다.      

더구나 괵왕이 낙양에서 올라왔다는 소리에 왕부 앞은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 때였다. 

도대체 이 아름다운 사내가 빠져 있는 왕비의 실체를 사람들은 더욱 궁금해했다. 


장안과 낙양의 이름있는 명문의 여인들은 너도, 나도 그와 혼인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정혼과 파혼을 반복할 뿐 정식으로 비를 들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의 혼인을 반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니.     

그에 대한 비방은 어느덧 사라지고, 왕부 앞은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잡은 물고기라!'     


흑단으로 만든 넓고 묵직한 탁자 한쪽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 

왕부 밖의 사정이야 어떻든 휘는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살며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휘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지성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으셨소?"

"월루에 계셨습니까?"     


지성은 휘의 입에서 월루가 튀어나오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그렇소!"     


그렇다는 말에 휘의 눈이 더욱 반짝거렸다.   

   

"궁금합니까?"

"나중에 저도 한 번 데려가 주십시오!"

"허!"  

   

지성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대가 그곳에 갔다가는 그날로 교방 문을 닫아야 할 터인데?” 

    

일반 평민도 아니고, 평민들도 절대 생각하지 않을 일이었다. 

여인이 기루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휘의 말에 지성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 가고 싶은 것이오?"


그냥 궁금했다.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냥 잡힌 물고기가 되기 싫을 뿐이지요!"


열린 창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달빛  탓에, 그녀이 미소가 더욱 화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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