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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23. 2020

#34 환궁

711년 봄      

우수(雨水)가 지났다.

겨우내 얼었던 눈이 이 녹고, 연한 싹들이 움트기 시작할 때쯤.


금전산에서부터 두 남녀를 실은 마치는 장안으로 향했다.      

낙양이 아닌 장안!     

장안은 낙양보다 몇 곱절은 웅장하고 거대한 국제 제국의 도시.      

대명궁을 향해 뻗은 주작대로를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를 중심으로 국내 상인들이 주로 머무는 동시와 북방의 소그드인들과 먼 남방의 이민족들의 상인들이 거래하는 서시까지.      

국제 무역의 중심지답게 양쪽 시장은 매일 불야성을 이뤘다. 장안의 방坊은 구역별로 바둑판 모양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시장과 거주지를 나누는 곳에는 도관이나 사찰이 하나씩 들어서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평민과 귀족들이 사는 곳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변방에서 큰 전승을 이룬 이지성을 괵왕에 책봉한다."

"백제의 부여 씨를 괵왕비에 책봉한다."     

부여 홍수는 왕부로 들어온 지 반년 만에 왕비로 책봉을 받았다.     

장안의 숭현방.      

낙양의 가선방 저택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라면, 숭현방은 왕부로서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      

친왕비가 머무르는 정궁은 왕부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전각이었다.

저택 하나가 들어갈 만큼 넓은 연못과 그사이에 아름답고 화려한 구름다리가 놓여있었다.      

"불생 낙원으로 들어가는 다리군요."     

눈앞에 높고 아름다운 아치의 화려한 다리를 보며 홍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비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래야 경외심을 갖는 법이라오!"

"전하께서도 경외심을 가지고 이 다리를 건너실 것입니까?"

"나는 이런 다리가 필요 없소! 그대에게도 필요가 없겠지만!"

지성은 지난날 염광현에서 채찍 하나로 넓은 내를 훌쩍 넘어가던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리뿐이겠습니까? 계단도 필요 없습니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친왕의 집무실과 왕비의 전각은 꽤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나 집무실 문을 나와 왕비 궁의 전각으로 들어서려면 반 바퀴를 돌아 나와야 했다.      

곧 무언가를 발견한 홍수는 활짝 미소 지었다.

괵왕의 집무실과 왕비궁 사이에 연못을 따라 만들어 놓은 좁고 긴 회랑이 눈에 띄었다.

회랑의 중간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고즈넉하고 소박한 정자도 만들어져 있었다.     

"저곳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 방부터 구경합시다!"     

왕비의 침실은 내실과 외실이 거대한 문 하나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제 방으로 들어온 그녀의 표정은 영 마땅치 않아 보였다.      

너무 넓고, 삭막했다.

그저 혼자 차를 마시고, 열린 문 너머로 연못이나 밤 풍경이나 볼 수 있으면 되는데.      

금전산의 따뜻한 구들장이 간절했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혼자 서 있으니 왠지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었다.      

낯선 물건들, 제 손때가 묻은 것들은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백목당에서 쓰던 찻그릇들이나 화로, 읽던 서책 같은 것들.      

그녀가 가져온 거라곤 몇 벌의 옷가지와 혼인날 패물로 받은 머리 장식이 다였다.

그때 지성이 긴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지성은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렸다.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길고 두꺼운 나무 상자에는 구름이 흐르는 것 같은 무늬가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류운문'     

뚜껑을 열자 눈에 익은 검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천의 검'     

"영노께서 만든 마지막 검이라오. 대신관이 전해달라 하였소!"     

홍수는 말없이 검을 받아들였다. 전장에서 들었을 때처럼 날이 선 푸른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명검이었다.      

전장에서 사람을 베고, 향로를 조각낸 검이라기엔 너무 깨끗했다. 홍수는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노인의 늙고 거친 손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홍수는 영노의 손을 잡으면 절대 놓지 않았다.

따스한 온정과 푸근하게 놓이는 마음.

그녀는 그리운 눈으로 검을 만졌다.      

"이제 그대 곁에는 내가 있소!"     

그녀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지성이 문득 말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소!'     

굳은 의지와 결심이 담긴 그의 미소도 함께였다.

전 같았으면 나는 스스로를 지킬 거라며 말을 잘랐을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성을 향해 곱게 웃어줄 뿐이었다.     

“천천히 쉬고 있으시오. 우리는 밤에 봅시다!”     

지성이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태자께서 놓아주시겠습니까?”     

홍수는 웃으며 반문했다.      

“알아서 잘!”     

그는 진심 나가기 싫은 사람처럼 다시 돌아와 홍수를 끌어안았다.

금전산에서 보낸 기억들 때문에 둘 사이에 따뜻했던 온기는 금세 뜨겁게 타올랐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곳은 별천지야! 세상에!"     

찬비의 목소리였다.      

"왕비마마! 소인들입니다!"     

지성은 아쉬운 얼굴로 홍수에게서 떨어졌다.      

"들어오너라! “     

홍수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감축드리옵니다! 왕비마마!”     

자신들이 들어오자 어색해하는 부부를 보며 찬비와 홍비는 다소곳이 무릎을 굽혀 조심스럽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공수했다.      

"일어나거라!"     

어색하게 서 있던 지성이 나가자 찬비가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홍수 곁으로 다가왔다.      

"마마! 앞에 정원 보셨습니까? 무슨 연못이 백목당 전체를 합쳐놓은 그것만큼 넓습니다!"

"이런 촌뜨기. 장안에는 처음인 게지!"     

홍비가 들떠서 떠드는 찬비를 놀렸다.      

"흥! 잘나셨어!"     

그들은 이 부부가 왜 어색해하는지, 얼굴은 왜 상기되어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을 보는 홍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 아무렴 어떨까. 낙양이든 장안이든.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마치 몇 달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아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북방에서는 늘 겪는 전투가 이곳에서는 먼 다른 나라의 일이었다.

이 생경한 이질감에 그녀는 잠시 혼란을 겪는 중이었기에.      

"에이그…. 내 이럴 줄 알았어!"     

찬비가 홍수의 입성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면 아니 됩니다. 여기는 낙양이 아니라고요. 이곳 귀족 부인들 입성이 얼마나 화려한지 모르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황실과도 가까워지셨으니 전하를 생각하시어 예법을 더 익히셔야 합니다."     

그동안 제 입성에 대해서는 별말을 안 하던 홍비까지 거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전하와 합궁을 하셨더라도. 절대 전하에게 잡힌 물고기 같은 인상을 주셔서는 안 된다고요!"

“잡힌 물고기라니?”     

여기서 물고기 왜 튀어나올까 하는 얼굴의 홍수를 보고 찬비는 홍수에게 더 바싹 다가앉았다.      

"전하의 눈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꽉 붙들어 놓으시라는 겁니다!"

"찬비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장안에는 유명한 교방도 많고…."     

홍비가 말끝을 흐렸다.      

"낙양의 그런 교방들하고 차원이 달라요. 특히……. 태자 전하께서 자주 다니시는 월루는…."     


월루?     

홍수의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필 그때 왜 함곡관의 푸른 장막이 펄럭이는 정자가 떠올랐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때문에 저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홍비와 찬비는 갑자기 어두워지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홍수의 손을 만지던 찬비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세상에! 손이 이게 뭐람! 더 못쓰게 됐네. 마마! 이제부터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요란을 떠는 찬비와 달리 홍비는 그런 그녀를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 그래도 검을 잡으시는 마마도 멋지십니다!"     

홍비는 제 주인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런 홍비를 찬비는 가늘게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알아듣기 힘든 말로 투덜대며 더운물을 가지러 휑 나가버렸다.      

"무진님께서도 왕부에 계십니다"

"알고 있어!"     

왕비궁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본 것이 왕실 재정 관련 책과 명부였다.      

홍비는 쭈뼛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무리 미워도 제 집안 아가씨. 양쪽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다 드러난 상황, 찬비도 홍비도 그녀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이미 서로 다짐을 한 뒤였다.      

"곽장군께서 장안에 계시니 조만간 연통을 주실 것입니다!"     


곽원진,      

태원곽씨의 장남이며 이름난 수재이자 뛰어난 장수였다.

젊고 호남형인 데다가 머리까지 똑똑한 인재를 여제는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측천무후의 칼이라 불렀던 적인걸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어린 나이에 진시에 합격했으나 스스로 무인의 길을 걸었고,

문란한 정치를 보느니 중앙보다는 변방에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그때 그가 만났던 사람이 흑치상지였다.      

그러나 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고, 그의 아들마저 안타깝게 요절하는 것을 본 원진은 조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당륭정변으로 예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이융기가 태자가 되고 난 뒤에야 그는 장안으로 돌아왔다. 날이 어두워지고, 시비들도 모두 물린 홍수는 내내 영노의 검을 보던 중이었다.

닦지 않아도 베일 것처럼 윤이냐는 검을 부드러운 천으로 천천히 쓸었다.      

삭!      

아주 작은 소리였다.

벽을 보고 앉아 있던 홍수는 재빠르게 뒤를 돌아 검을 뻗었다,

그녀가 겨눈 검 끝이 정확히 무진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겨누고 있었다.     




한 시진 전.      

무진의 처소에 찬비가 들었다.      

"말한 것은 가져왔느냐?"

"예!"     

찬비는 얼굴도 들지 않고 무진 앞에 작게 싼 보자기를 내밀었다.

말없이 그것을 쏘아보는 그녀의 고운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정말로 두 사람이 밤을 함께 보냈느냐?"

"그러하옵니다!"

"공주가 부상으로 오랫동안 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황태의 께서 다녀간 후 일어나셨다고 하옵니다!"

"흥! 운도 사납게 좋구나!"     

말을 마친 무진은 턱짓으로 찬비를 물렸다.

찬비가 가져온 작은 보따리를 내내 노려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열었다.

여인의 속옷 위로 비친 선명한 핏자국.      

무진은 신경질적으로 보자기를 화로에 던져 넣었다.

막대기를 들어 화로를 마구 들쑤셨다.

풀리지 않는 분노가 왕비궁을 향했다.      

'반드시 없애버릴 거다!'     

그녀의 눈에 화로의 불꽃이 타오르듯 비쳤다.      

***     

"그래서?"     

무진의 목에서 검을 거두지 않은 홍수는 지금 제 앞에서 말하는 무진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는 중이었다.      

"그래서? 라니요? 마마! 이는 중요한 사안이옵니다!"

"그래?"

"이는 황실에 누를 끼칠 수 있으며, 앞으로 생기실 황손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사옵니다!"     

‘황손의 권위?’     

홍수의 눈썹이 휘어졌다.      

'아! 이거였군.'     

홍수는 무진의 목에 겨누었던 검신을 거두었다.      

"그래서 이 야밤에 나를 찾아왔군. 기척도 없이. 굳이 나를 위해서?"     

무진은 마치 제가 이긴 것처럼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변방의 미개한 나라에서 여인의 정절을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당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듣자 듣자 하니. 그대의 입도 사정을 봐주는 것 같지 않구나! 그런데 내 검도 그리 사정을 봐주는 편이 아니라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제 눈앞에서 무진을 안고 가던 지성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대 말대로 나는 미개한 나라의 공주니까?"

“체통을 지키세요! 왕비!"     

무진은 거만하게 홍수에게 다가왔다. 홍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보니 그녀는 태평공주와 닮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홍수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전장에서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보던 묵철이 훨씬 대하기 편했다.      

활이든 칼이든 아니면 주먹이라도 휘두르며 싸울 수가 있으니까.

이건 어린애랑 싸우는 것보다도 힘들었다.      

"그럼 그대 뜻대로 하세요!"     

홍수는 진심이었다. 이건 나라의 국운이나 신념을 가지고 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차라리 동네 개싸움이 낫지.

머리가 아프니 속이 울렁거렸다.

무진은 그런 홍수를 보고 의기양양했다.      

"맘껏 기대하십시오! 그 자리에서 나올 날도 머지않으셨으니!"


훗! 무진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홍수는 돌아서 나가려는 무진의 뒤통수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대 마음껏 떠들어도 좋으나 그 뒷감당도 혼자 하셔야 할 거요!"     

움직이던 무진의 발이 거기서 딱 멈췄다.

왠지 모르는 한기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뭐가 잘못됐을까?

그럴 리가 없다.     

친왕의 혼례에서 첫날밤의 증거는 매우 중요했다.

앞으로 태어날 황실 후손을 위한 정절의 서약이었기에

이게 없으면 태어난 아이의 출생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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