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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Dec 10. 2020

#36 잡힌 물고기는 되지 않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힌 물고기라니. 누가 물고기라는 소린지.           


“잡힌 물고기라 하였습니다.”

“누가 잡힌 물고기란 말이오?”

“저 말입니다.”          


살며시 제 손을 들어 가리키는 그녀의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성은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한껏 틀어 올린 머리에는 모란이 정교하게 조각된 금빛 머리 장식이 꽂혀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에 손끝과 치마 끝에는 붉고 푸른 색동이 덧대져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본 휘의 모습 중 가장 여인다운 모습,      

금전산에서 그녀를 처음 보던 날을 떠올렸다.      


어미를 눈앞에서 잃어버리고 울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 투영됐다. 

피를 흘리는 어미를 부여잡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던 그녀의 울부짖음이 가슴을 흔들었었다. 


그녀가 지르는 비명처럼 아프고 절망스러웠던 날.     

 고통으로 어둠의 나락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에게 휘는 절대 끊어지지 않을 구원의 손길이었다.           

잡힌 물고기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대가 있으므로 내가 숨을 쉴 수 있으니, 내가 물고기고, 그대는 물이요!’     

'잡힌 사람은 나요!'     


그는 이 마음을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루를 가면 잡힌 물고기가 되지 않는단 말이오?”  

        

긴 속눈썹과 물빛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저를 빤히 바라본다. 

          

“기루에 사내들이 많이 가지 않겠습니까?”     


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래서?”     


그의 입술이 참지 못하는 웃음으로 실룩거렸다. 


“그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도 있지요!"    

 

휘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유는?”

“아시지 않습니까?”

“음….”     


지성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 눈을 감았다.        

   

“제가 여인이라 아니 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그럼...?"

“궁금하여 그렇소.”     

     

건안성의 거친 땅에서 자란 그녀였다. 

바늘보다는 검을 잡고, 눈썹을 그리는 붓보다 활을 더 많이 잡고 있었던 여인. 

갑자기 그녀가 기루에 관심을 보였다.     

     

그 속뜻에 짐작은 가지만….     


“그런데….”     


지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대에게 잡힌 물고기를 말한 이는 누구요?”

“찬비에게 들었습니다. 여기서 잡힌 물고기가 되면 안 된다고요.”        

  

쿡! 쿡! 지성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잡힌 물고기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 걸까.  

         

“기루와 잡힌 물고기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요?”       

   

그러자 휘는 지성에게 바싹 다가왔다. 

아찔한 그녀의 살냄새가 그의 후각을 야릇하게 자극했다.       

    

“장안의 모든 소문은 평강리에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저는 지금 이곳에 잡힌 물고기가 되어 버린 것처럼 쓸모없게 느껴져서 말이지요."     


장안의 숭현방은 귀족과 황실 가족들이 주변에 모여 있었다. 

매일 쏟아지는 인사와 관심, 그리고 적당하게 떠보는 시선들. 

딱히 귀부인들과 접촉이 없었던 휘에게는 이곳이 전장보다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황실 여인이 기루에 가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오.”

“그 월루라는 곳에 태평공주께서도 드나드신다지요?”    

      

지성의 눈빛이 흐려졌다. 

절대 안된다고 말할 수 없게 준비된 질문이었다.  

    

“전하께서 일부러 월루를 가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휘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신 뒤였다. 

          

“잡힌 물고기처럼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태평공주야말로 황실 어른이시니 찾아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월루는 고관대작뿐 아니라 황실 종친들의 놀이터로 종종 이용됐다. 

월피라 부르는 초승달 모양의 연못과 그 위를 가득 메우는 부용화. 그리고 달을 볼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정자.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함곡관의 아름다운 정취를 그곳에서도 볼 수 있을 터였다.  

         

“월루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휘는 조용히, 그러나 확고한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처럼 장안에 떠도는 소문들은 대부분 평강방 월루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은 바로 태평공주였다. 


그녀가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는 곳.

이렇게 대놓고 황궁 앞에서 비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휘가 기루를 가겠다고 하는 것은 태평공주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 성격상 어느 곳에서고 그녀와 반목하게 될 터인데, 차라리 기루에서 서로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괵왕비가 평강리에 드나들면 큰 문제가 됩니까?”        

  

휘는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싫다고 하면 가지 않을 것이오?”

“음…. 그것은…….”          


휘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깨를 꺾었다. 

지성은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이 꼿꼿해 보이는 여인의 알맹이에는 온통 귀여운 소녀의 모습뿐이다.     

 

“월루는 그대 말대로 태평공주가 주인이오. 당신이 간다고 하등 문제 될 것 없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휘는 제 얼굴을 쓰다듬는 지성의 손을 감싸며 활짝 웃었다.                




‘여러 친왕과 부마는 지금부터 금군과 병마를 관장할 수 없으며 현재 맡은 사람은 모두 다른 관직으로 바꾸도록 하라!’          


황제의 제서가 떨어졌다.           

지금의 관직과 조정은 여제 때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이를 바꾸려는 시도. 

내각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개혁을 위해서는 가장 골치 아픈 이들이 바로 사봉관 들이었다.      


사봉관.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여제와 태평공주는 앞장서서 없는 관직도 만들어 돈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타락한 조정을 바꾸는 것은 황제가 태자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다.

태평공주는 이에 대해 거센 반론을 내놓았다.           


"지금 이리 조정의 관직을 들쑤셔 놓는 것은 선대왕의 잘못을 파내려 하시는 것입니까?”

“공주는 말을 삼가라!”     


황제의 얼굴이 음산하게 번뜩였다.      


“아니면, 이 모든 일의 결말이 저에게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태평공주의 한 마디에 장내가 술렁이자 예종은 크게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있는가?”          


그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옆에 있던 태자 이 융기 또한 더는 말을 거들지 않았다.    




“그래, 태자께서 이 고모를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요?”          


평강방, 월루      

북리에서 가장 화려하고 유명한 무희들이 춤을 추는 곳.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함께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고 있었다.   

   

화려한 군무 사이로 이융기와 태평공주의 시선이 날카롭게 교차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제 속을 보이는 허술한 이는 아니었다.           


“그동안 격조한 듯하여 이리 뵙자 청하였습니다. 포주에서는 편안하셨는지요?”

“우리 조카님께서 이리 고모를 챙기는 마음이 지극한 줄 몰랐습니다!”

“저야 늘 고모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어디 제가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클까요? 호호호”          


오가는 술잔과 대화 속에 불꽃이 튀었다.           


“태자는 요즘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는가?”        

  

태평공주는 다짜고짜 이융기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묻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듣자니 재상 두 분께서 태자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공을 쏟고 있는 듯해서 말입니다!”   

       

태자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꼬리가 높았다. 

그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리자 무희들과 악공들이 물러갔다.       

    

“설마하니 태자도 그들과 동조하는 것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융기는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 읍소했다.         

  

“만에 하나 이 조카가 고모님께 그런 뜻이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자리를 만들겠습니까?”       

   

대답하는 그의 말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그것이 저에 대한 두려움이라 여겼으나, 그것은 착각. 

그녀에 대한 그의 분노였다.           


“태자는 말 한마디, 행동하나 조심해야 할 겁니다. 다시 한번 그 자리를 누구 덕에 있게 되었는지 잊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마마”          


고개 숙인 이융기의 얼굴이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그녀 앞에 서 있을 때마다 느껴지는 기시감. 사악하고, 문란하고, 안하무인 공주. 그리고 측천무후. 그녀의 얼굴에서 여제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몸을 떨었다.           


‘초왕! 너는 이런 꼴을 견디지 못하겠지!’     

     

이융기는 초왕의 주검을 눈앞에서 본 날, 종일 미친 사람처럼 마시고 울었다. 

언젠가는 그 죽음이 제가 될 수 있음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초왕의 죽음은 곧 제 죽음이었다. 


자신이 꿈꾸었던 세계가 손안의 모래처럼 사라져 흩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그는 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서서히 목을 옥죄는 공포.      


“오해를 불러일으킨 재상들의 파직을 상소하겠습니다. 고모님께서는 화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다. 

용피선을 흔들며 술잔을 든 그녀의 눈이 조소하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한 번 믿어 보지요!”        

  

그는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짓이기듯 입술을 씹었다. 입술이 터지고 그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못 본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잔인한 미소를 띠고 월루의 은밀한 내실로 사라졌다.           

결국, 황제의 모든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여제 때 사봉관들은 여전히 조정의 주요 관직을 장악했다. 

그들이 태평공주와 연이 닿아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 초입이 다가오고 있었다.      

숭현방의 생활도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을 무렵, 

휘는 그녀의 거처인 부용각 구름다리 위에서 서서 연못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멀리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담을 넘어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뒤따르는 시비에게 물었지만, 알 턱이 없었다.          

 

“헉! 헉! 마마!”          


찬비가 거의 엉금엉금 기어오르듯 부용각 구름다리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거의 숨이 목구멍까지 들이찬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마! 에이고 숨이야!”          


그녀는 계단을 다 올라와서도 한참을 서서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저기! 하윽. 유, 모가 헉! 말입니다! 헉!”

“유모가? 왜?”          


한동안 잠잠하여 이상하다고 여겼건만.           


“여기 숭현방 귀부인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하옵니다!”

“그래?”     


그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엄연히 왕부의 안주인이 따로 있거늘.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찬비는 우물쭈물 맞잡은 손가락만 잡아 뜯었다.


“말하게!”

“그것이…….”     

     

찬비의 표정을 보아하니 가히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지금 비 마마를 화연각으로 오시라는 말을…….”

“!”          


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짓을 해도 선을 넘지 말라 경고를 했었다. 

감히 태원곽씨 명성을 등에 업고 제 처소로 귀부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저를 부른 것이었다.     

보란 듯이.      


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녀에게 진짜 왕부의 주인을 알려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가자!”

“예. 예에?”          


휘가 스스로 화연각으로 발길을 돌리자 찬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이렇게 숨이 가쁘게 달려온 것은. 

저 무도한 유모에게 지엄한 명령을 내릴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각의 주인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찬비는 생각했다. 


태원곽씨의 위세는 역시 무서운 거다. 

태복경 원진은 장렬과 함께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의 누이인 무진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변방 출신의 공주가 아무리 이 왕부의 안주인이라 해도, 무진의 근본은 퇴색되지 않는가.           

그녀의 얼굴이 씁쓸하게 굳었다.      


“이런, 제가 늦었나 봅니다!”          


휘의 등장으로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딱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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