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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6. 2021

#37 끌려 나가는 영애

무진이 머무는 화연각은 왕부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원래부터 사치스럽고 허영이 가득한 여자였다. 


장안으로 오고 나서부터 그녀는 그동안의 가면을 벗고 대놓고 고가의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유모라는 이름뿐인 직함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 듯. 무진은 마치 자신이 후궁이라도 된 것처럼 시비들을 부렸다.      


"이번에 태복경께서 재상에 오르신 것을 매우 감축드립니다. 부인!"   

 

그녀는 회당에 모여 있는 귀부인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었다.      


'부인?'


그녀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듣기 싫지 않았다. 어차피 지성은 자신을 이곳에서 내칠 명분이 없다. 

들일 후궁들도 없으니, 왕비 말고 부인이 되는 것은 저뿐이리라.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부인이라니요. 저는 그저 왕부의 유모로 남는 것이 좋습니다."     


하얗고 여린 얼굴, 길고 가녀린 손가락은 가증스럽고 연약한 척 낯빛을 흐렸다.     


"무슨 그런 말씀입니까? 전하께서 후궁을 아니 들이신다는 뜻은 무진 님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진이 재상으로 등극하자 태원곽씨 본가보다 숭현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왕부 문턱을 닳도록 드나드는 이들은 무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태평공주의 친동기간처럼 지내는 사이. 

황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한족의 사성(四姓) 가문 중 하나.      


“부인께서 이리 고우시니 전하께서 어여삐 보실 것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략혼인을 한 왕비보다야……."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변방의 공주 따위가 왕비가 되냔 말입니다."     


여인들은 옷차림과 화장까지 당대 유행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석탑을 쌓듯이 높게 틀어 올린 머리와 붉게 물들인 화장과 뽀얗게 드러난 여인들의 가슴은 정점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관대작들의 부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무진 앞에서 아첨하기로 약속이나 한 듯 열린 여인들의 수다는 계속됐다. 

무진 역시 미소 지으며 그녀들의 말을 막지 않았다. 

이제 제 세상이라. 


건안성의 공주 따위야 제 한 몸 지켜줄 든든한 배경 하나 없는 끈 떨어진 연.      


그러나 저는 다르다. 

집안이 있고. 재상이 된 오라비가 있으니 왕비가 되어야 하는 것은 미천한 공주 따위가 아니다. 


그녀의 가려움을 주변에서 알아서 긁어주고 있으니, 마치 제가 이 왕부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제 조만간 재상이 되실 태복경을 생각해서도 곧 바뀌지 않겠습니까?"

"태평공주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끔찍이 아끼시는 동기간이신데…."

"얼마 전에는 싫다 하시는 황상의 뜻도 꺾으셨다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태평궁을 탄핵하려던 어사대부께서 기주로 좌천되셨다지요?"

"결국은 그리되셨습니까?"

"폐하께서도 태평궁의 뜻은 꺾기 어려우시니까요!"     


무진은 한껏 구름 위를 나는 듯 기분이 좋았다. 

지금 말하는 그녀들의 말 중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태평궁이나 태평공주를 비하하는 이들은 모조리 좌천을 당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때때로 황제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마저도 공주가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황제는 허둥지둥 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결국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제 오라비가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멀리 위용 있게 뻗은 왕비궁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무진은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의 현실을.      

지금 그 자리가 망국의 공주 따위가 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망국의 공주 따위보다 재상의 누이인 제가 그 자리에 더 어울림을. 


제 앞에서 무너지고, 몸서리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얼마나 벼르던 일이던가. 

그녀는 기어이 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왕비께서는 아직이시냐?"


옆에 있는 시녀에게 묻자. 대답이 없었다.     

 

"오겠습니까?"

"차마 낯을 들고 어찌 이곳에 오겠는지요."

"호호호"     


모여 있던 여인들의 웃음소리로 왕부 전체가 울렸다.      


"뭐가 그리 재밌으신지, 저도 좀 알아야겠습니다."     


차분하지만 맑고 투명한 여인의 목소리가 화연각을 울렸다. 

차를 마시던 무진의 입술이 굳었다. 


왜! 그녀의 목소리만 듣는 것으로도 이런 낭패를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매를 고치고는 회랑으로 걸어 들어오는 휘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 들어오는 왕비를 보고도 멀뚱히 보고 있던 귀부인들도 무진이 일어나자 주섬주섬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를 보는 여인들의 눈빛이 바빠졌다.   

   

소문만 무성한 망국의 공주.

전장에서 싸움만 해서 여인 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


심지어 검을 쓰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지금의 자리를 괵왕을 겁박하여 얻었다는 추문도 있었다. 

투박하고 거칠고, 사내들보다도 더 거친 여인이라 들었다.      


그런데….     

저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마치 석상으로 깎아 놓은 것 같은 몸매. 

여인의 풍만함만 강조된 힘없는 하얀 살덩이와는 달랐다. 


마른 듯했지만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몸은 그녀가 입은 옷을 더욱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이게 했다. 온몸을 감싼 듯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긴 팔다리만큼이나 수려한 이목구비.

소문과는 전혀 다른 기품과 고혹적인 자태가 괵왕인 이지성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재미나십니까?"


한 눈에도 저들과 다른 외양에 이질감이 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무진이 인사를 하자 나머지 귀부인들도 따라 인사를 했다. 

모두 무진과 하나가 되어 그녀가 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는 휘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미리 왕비마마께 인사 여쭙지 못한 것은 송구합니다."     


먼저 나서서 말한 여인의 눈에는 한껏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요! 저를 찾아오시면 되실 것을 이렇게 유모를 찾다니 누가 보면 왕부의 주인이 바뀌었다 해도 믿겠습니다."     


휘의 말에 귀부인들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찰나의 표정으로 그들의 눈빛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저는 오늘 오후에 중한 일이 있는 것을 잊은 듯합니다."    

 

갑자기 꽁무니를 빼듯 자리를 떠나려는 여인들이 생겨났다.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자.      


계단을 하나씩 올라오는 휘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발을 붙들었다.   

  

"아니. 제가 왔는데. 어디들 가십니까? 설마 왕부의 안주인을 유모로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아…. 아니옵니다!”     


그녀의 말에 당황한 여인들이 너도나도 횡설수설했다.      


"그렇다면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     


여인들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중 태반이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무진의 얼굴이 밀랍 인형처럼 차갑게 변해갔다. 


낙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휘는 그들의 표정이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고.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저는 정말 이렇게 기름진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습니다. 유모는 내 식성을 잘 아실 텐데. 이런 음식을 차려놓고 나를 부른 연유가 뭔가?"     


전혀 타박하려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오금이 저렸다.      


"모두 저를 위한 것입니다. 오라비께서 이번에는 조정의 재상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무진은 애써 고개를 들었다. 

귀부인들은 차마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경악에 찬 얼굴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잘못하다간 이곳에 있었던 죄로 저들의 등이 터지게 생긴 일.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내가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휘의 물음에 무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답하는 무진의 언성에 가시가 돋쳤다.      


“유모께 다시 한번 알려드리지요!”

“뭐요?”

“본인이 말과 행동은 모두 그대의 책임이라고!”

“!”     


요란하게 화연각 입구가 활짝 열렸다. 

한 무리의 검은 미복을 입은 여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마지막으로 성큼성큼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이는 바로 지성이었다. 

     

"모두 영애를 모셔라!"   

  

그의 한 마디에 다섯 명의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놔라! 전하!"    

 

무진의 몸은 바람 앞의 버들처럼 흔들렸다. 

경악과 믿을 수 없는 눈빛.

이제껏 보여주던 고상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악을 바락바락 쓰며 버티려 했다.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놓아주십시오! 제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성이 자신 죄인처럼 다루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다. 그녀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휘를 노려보았다.  

    

"부끄러운 줄 알거라!"


갑자기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내는 오라비인 원진이었다. 


"오라버니!"

"아버지와 내가 더는 너의 그 못된 행태를 보아줄 수가 없다."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동생을 생각하는 조금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전하와 오라버니께서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집안에 해악을 미치는 행동은 참아 줄 수 없다! 감히 그동안 내 경고를 무시한 것이냐?"

"저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무력으로 끌고 내려왔지만 완강하게 버티는 무진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끌고 나오지 못해?"

"예!"


그제야 호위들은 무력으로 무진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마마와 전하께 소란을 끼쳐 송구합니다! 이 일은 따로 죄를 청하겠나이다."

"아닙니다. 유모께서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태복경께서는 괘념치 마세요."     


휘는 저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내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지성은 말없이 저를 부르며 끌려 나가는 무진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복경께 면목이 없네."

"소인이야말로 부끄럽사옵니다."     


원진은 고개를 들어 휘를 바라보았다. 

건안성의 보석. 백제 유민들의 태양이라 불리는 여인. 


그는 변방에 있으면서 그녀에 대한 소문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군왕이 죽이려 하는 조카로.

부여 씨의 적통이자. 혈족의 힘을 가진 왕족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건안성을 단 하나의 화살로 전세를 바꾼 여인으로.     

전장의 한 복판에서 푸른빛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갔을 때 그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피칠갑을 한 채 검을 휘두르는 여인의 모습은 눈으로도 보고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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