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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8. 2021

#43 태평궁의 밤

모두가 자신을 어려워했다. 이 당나라에 나와 당당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부여 휘, 그녀를 대하면서 불편했던 이유가 점점 명확해졌다.      


남에게 쉽게 굴복하지 않는 마음. 이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멸망했을지언정 왕족으로 태어난 태생적 고결함이었다. 태평공주는 휘의 그 점이 못마땅했다.     

 

“사내들의 정이란 원래 가벼운 법입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다 하겠지만, 곧 비의 존재는 잊히겠지요.”     


조정에 저를 지켜줄 세력 하나 없는 변방의 공주. 태평은 휘에게 그것을 각인시키려 했다.     


“지성, 그 아이는 황족이에요. 황족이 후궁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변방의 공주 하나 때문에 수도방위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수도방위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후궁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주께서 가지고 계신 전답만 조금 백성에게 나누어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탁! 태평공주는 마시던 잔을 거칠게 내리쳤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년이구나!”     


태평공주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공주께서 저를 죽이고자 하셨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태평공주는 대답 대신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시녀가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다.      


“내가 너를 그냥 두는 이유는 지성, 그 아이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지.”

“그래서 공주는 저를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태평공주는 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는 두려운 것이 없느냐?”     


두려움. 처음 부여 경이 저에게 독살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을 알았을 때.

금전산에서 자객을 맞닥뜨렸을 때.

그리고, 건안성에서 거란과 해족에 의해 성문이 뚫렸을 때.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어린 시절에는 죽음을. 나이가 들어서는 건안성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유민들의  기둥이었던 흑치 장군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저를 지키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제 주변에 남은 이들이 점점 사라진다는 두려움은 공포에 가까웠다.   

  

그런데,      


“새끼를 가진 동물들이 왜 그리 사나운지 아느냐? 그것은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너도 이제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겠지.”

그렇습니까?”


이 여자는 두려움을 알까.

세상을 발아래 둔 태평공주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너는 어찌해도 상관없겠다만. 괵왕은 좀 다르지 않겠느냐!”     


밝고 환하게 웃는 태평공주와 달리 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이를 가진 저를 미끼로 지성을 이용할 생각인 것이다.      


“뭐, 여기 있으면서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네가 죽는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이 궁 안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어, 나가는 즉시 돌아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갇힐 것이니. 호호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날이 밝자 태평궁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완전 무장을 한 지성은 저를 말리는 문지기를 물리치고 태평궁 안으로 들이닥쳤다.  넓은 대리석으로 바닥을 깐 회랑과 높은 계단 위에는 황궁의 것과 같은 황금색 기와가 그녀의 권세를 보여주듯 위용 있게 뻗어 있었다.  


무장한 군사는 전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허리 찬 장검을 거두지 않았다.

지성은 높은 전각까지 연결된 돌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용의 무늬가 양각된 굵은 기둥이 있는 전각의 붉은 문이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노란 비단옷에 붉은 연지를 바른 주홍장의 얼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화려한 금빛 나비가 태평공주의 머리에 얹혀있었다.  

     

“괵왕, 이지성, 진국 태평공주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지성은 대리석 회랑에 무릎을 꿇어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시종들이 그녀를 위해 넓고 화려한 금빛 의자를 가져오자, 그녀는 노란 비단옷자락을 펄럭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이곳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한 연유가 무엇이냐?”


지성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짙은 눈썹 밑으로 어두운 그늘이 서려 있었다. 한껏 높은 이마를 추켜올린 태평공주는 지성을 거만한 눈초리는 그의 얼굴부터 허리에 찬 검에 머물렀다.      


“어찌하면 제 아내를 돌려주실 것이옵니까? 마마!”

“왕부에 계셔야 할 왕비를 어찌 이곳에서 찾으시는 게요?”     


태평공주는 지성을 향해 잔뜩 비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도통 괵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묵철을!”

“!”

“얼마나 믿고 계십니까?”     


지성의 외침에 태평공주는 비단옷자락을 거칠게 떨치며 몸을 돌렸다.      


“괵왕은 말을 삼가라!”

“소인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장을 하고 나에게 오면 무슨 해결책이 된다더냐?”     


높은 계단 아래로 넓은 대리석 바닥에는 어느새 궁내 군사들이 만일을 준비해 공격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성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저 하나 잡고자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일을 벌이십니까? 공주마마!”     


그녀는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정오의 햇볕이 따갑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시립 해 있던 시녀들이 어느새 넓은 비단 장막을 그녀 위에 드리웠다.  

    

“갑자기 이곳에서 묵철을 입에 올리는 것이 매우 불쾌합니다. 괵왕!”

“그럼 질문을 달리하지요! 후궁으로 염두에 두신 가문이 어디십니까?”     


후궁이라는 말에 태평공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생각이 바뀌신 게요? 참으로 현명하신 선택이요.”

“왕비가 돌아와야 할 겁니다!”

“왕비야 어디 있는지 내 알지 못하나, 하루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내 도우리다.”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지성은 보이지 않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는 태평공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계단을 향해 뒤를 돌았다.      


“만에 하나!”

“!”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태평공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중앙 수비군과 황궁의 우림군만 장악한다면 지금의 태자는 무용지물이다. 만약 괵왕과 태자가 손을 잡고, 황제가 묵인한다면,

태평궁을 치기 위한 정변이 다시 일어나리라.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부여 휘만 내 수중에 둔다면 괵왕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태평공주의 생각이었다.      


‘공주께서는 묵 철을 얼마나 믿고 계십니까?’     


지성의 한 마디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묵철은 위험한 자다. 그로 인해 당은 변방의 안서도호부를 잃었다. 그뿐인가? 그의 요구대로 금성 공주와 혼인을 시키지 않았던가? 저 또한 과거에 돌궐에 볼모로 혼인을 할 뻔했던 기억이 있으니.      


묵 철은 야심과 집착이 강한 자였다, 적당히 여자와 먹을 것을 주면 고분고분할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괵왕비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미 태평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변방이 아닌 대당의 수도, 장안.      


이 한복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이것이 얼마나 그녀의 큰 착각인지 태평은 알지 못했다.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어차피 부여 휘는 조정에 그녀를 지켜 세력 하나 없는 변방의 공주. 그녀를 지켜줄 이는 오로지 지성뿐이다. 그러니 이번이 그를 가질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태평은 애써 불안을 지워냈다.

모든 일은 내가 의도하는 데로 이루어질 터.      


빽빽이 늘어서 있던 군사들이 지성을 위해 길을 열었다. 마치 바다가 갈라져 길을 내듯이 군사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문 앞에서 지성은 다시 한번 그녀가 서 있는 회랑 앞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저 너머 어딘가 그녀와 제 아이를 생각하니 그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져 왔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지성은 휘를 믿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반드시….     


“여봐라!”


지성이 사라지자, 태평은 뒤에 있던 호위를 불렀다.      


“지금부터 궁 전체를 샅샅이 뒤져라!”

“무엇을 말입니까?”

“쥐새끼 하나가 숨어들었을 것이다!”    

 

풍위, 바람이 지나간 듯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지성의 별명이었다. 그중 그의 그림자 호위인 장소는 지성과 항상 함께 다니지만 절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작은 구멍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야!”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지성은 태평궁에 당당히 걸어 들어와 뭔가 남겨 두고 떠났다.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일단 궁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군사들의 시선을 중앙으로 쏠리게 만든 후, 장소는 무사히 궁 안으로 잠입했다.     


그날 밤.      

휘가 머무는 전각이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 끈 다음, 촛대를 내리쳐 끝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어두워진 방안, 육중한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도 묵 철이었다.


그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왔다. 휘장 너머로 몸을 숨긴 그녀는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여간 재빠르긴, 크흐흐.”     


듣기만 해도 섬뜩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뻣뻣해졌다.      


“오늘 이곳을 함께 나갑시다!”

“이곳에서 이리 소란을 일으키고도 무사할 듯싶더냐.”     


휘의 목소리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은 당의 수도, 장안이었다. 황궁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어째서 저 자 이곳을 활보할 수 있는가.    

“어차피 이곳에서 너를 죽인다 한들, 태평공주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가 점점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불쌍한 운명이 아니더냐! 금전산에서 어떻게 너와 내가 만났을까? 그 이유를 말해주랴?”     


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묵 철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너를 죽여도 좋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네 숙부인 부여 경이란다. 너는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휘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두 귀로 확인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저주받은 피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너로 인해 사람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다들 너를 죽이고 싶어 하겠지! 나는 다르다. 나와 함께 돌궐로 함께 가자!”     


‘저주받은 혈족!’


‘너는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부여 경의 탁한 눈동자가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그가 그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거친 호흡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정확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는 손이 뻗어오자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그녀의 눈에 전각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갈 수 있는 기회!’     


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쪽으로 내달렸다.     


“어딜!”     


그녀의 허리를 낚으려는 순간, 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채찍을 풀었다. 채찍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겼다. 자신의 무릿매를 보자, 묵 철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일었다.      


“나를 잊지 않고 이리 생각해 주고 있었구나.”     


묵 철의 말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렴, 어찌 잊겠느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어둠을 뚫고 그녀의 얼굴에서 싸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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