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안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다. 얼마만의 숙면인가? 기지개를 켜는데, 몸이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아니, 뭔가 이상하다. 기지개를 켜다만 채로 눈을 번쩍 떴다. 높은 천장에서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진다. 벌떡 몸을 일으키니 작아진 몸이 보인다. 어제 아들을 씻기고 '스스로 한번 입어보라'며 바닥에 펼쳐놓았던 그 옷을 입고 있다.
'설마...'
옆에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원래 몸의 '내'가 있다.
"엄마, 엄마!"
두 손으로 그녀를 흔들며, 나도 모르게 엄마라고 불렀다.
"으응... 우리 아들, 잘 잤어?"
육중한 몸이 돌아누우며 나를 쓰러뜨리고는 끌어안았다. 그녀의 무거운 팔 아래 깔리고 말았다. 코 앞에 있는 그녀는 잠에 취해있다. 아는 얼굴이지만 여러모로 낯설다. 크기와 생김새가 이질적이다. '나' 같이 생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그녀에게는 어떤 변화도 없나 보다. 내 자아가 아이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게 그대로 인 것 같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건 한여름밤의 꿈 정도의 해프닝일 것이다. ‘나‘의 아이가 되었다. 엄마, 아빠, 여동생이 있는 네 살 어린이가 되었다.
"에에에엥-"
정적을 깨고 아기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습관적으로 문을 벌컥 열고는 동생에게로 향한다. 혹시 요 녀석이 알아본 걸까? 눈이 마주치자 넙데데한 하얀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우리 아가, 잘잤쪄요?"
아기가 몸을 뒤집더니 평소처럼 돌진해 온다. 왠지 녀석은 아는 것 같다. 시선을 고정하고, 침을 줄줄 흘리며, 배를 튕기며 다가온다. 평소 귀엽기만 했던 모습인데 오늘은 좀 다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통한 팔다리가 위협적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이에요?"
"그럼~ 월요일! 어린이집 가는 날~"
그건 곤란하다.
"안 가고 싶은데... 집에 있고 싶어요..."
뒤통수가 따갑다. 나의 천적, 아빠가 동그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는 입을 옆으로 찢으며 숨을 들이쉰다.
"씁-!"
경고를 받고 만다.
‘이 상황에 어린이집까지 가야 한다고?’
곤란한 일 투성일 것이다. 어떤 핑계가 가장 좋을까? 초조하다. 하지만 떠오르질 않는다. 이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우리 집은 여느 때와 같이 착착- 등원 준비를 해간다. 눈 깜짝하니 어느새 아빠 손에 이끌려 신발장 앞까지 와있다. 이렇게 길을 나서면 꼼짝없이 어린이집에 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 엄마다. 엄마를 공략해야 한다. 눈물에 약한 그녀는 내가 울면 구해줄지도 모른다. 아니, 구해줄 것이다.
“엄마…”
그녀를 찾아 고개를 돌리려는데, 아빠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쥔다. 모자를 눌러써 그림자가 진 눈이 말을 건다.
‘네가 뭘 하려는 줄 알아. 그거 하지 마. 큰 소리 나기 전에.’
“… 다녀오겠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어린이집에 가는 것은 대수인가?
혼난 것도, 싸운 것도 아니지만 등원길의 아빠와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그런데 화가 난 줄 알았던 그가 비타민씨 사탕을 입에 쏙 넣어준다. 심지어 눈을 맞춰 미소 지어준다.
"오늘은 어떤 선생님이 문 열어주려나? 하원해서는 뭐 하고 놀래?"
어색한 줄 알지만 시도하는 스몰토크, 질문마다 말꼬리를 올려보지만 평상시 무심한듯한 그의 말투는 어쩔 수 없다. 그가 아들의 표정을 살피고 기분을 맞추려 한다. 처음 보는 모습. 애쓴다. 그가 애쓰고 있다. 생각해 보니 어린이집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 아이의 세계'를 직접 들여다볼 기회이기도 하다. 순순히 그를 따른다.
막상 도착하니 어색하지가 않다. 몸이 알아서 척척 움직인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냥 하면 된다. 작은 미끄럼틀을 몇 번 타주고, 벽돌 블록으로 집을 지으니 친구들이 다가온다.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아이들 틈에 섞인 것 같다. 본체가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말은 줄이고, 갈등이 있을 것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한다. 친한 친구 옆에 있으면 갈등이 적을 것이다. 같은 반 친구라도 더 친하고, 덜 친한 친구가 있다. 자석처럼 붙어 다니며 자기들끼리만 노는 아이들도 있다. 더 좋고 싫음을 그대로 내비치는 어린이들의 투명함이 이렇게 가혹한 것이었나? 그렇다고 나라고 다르진 않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은 조금이라도 얼굴이 익은 친구 곁을 맴돈다.
열심히 놀고 있자니 누군가 짐가방을 잔뜩 들고 반으로 들어온다. 사진으로만 봤던 특별활동 음악 선생님을 직접 보니 신기하다. 구연동화를 하는 듯한 말투와 억양이 귀에 쏙쏙 박힌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내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고기를 잡으러 산으로 갈까나~"
노래에 맞춰 물고기 모양 탬버린을 흔든다. 물고기 모자에 알록달록 비늘을 붙이며 꾸미기도 하고, 그걸 쓰고 친구들이 흔들어 주는 파란 천 아래로 뛰어다니며 헤엄을 친다. 체계적이고 흥미로운 예체능 통합 교육에 감탄한다. 이래서 '특활-특활-' 하나보다.
많이 뛰어서 그럴까? 점심도 꿀맛이다. 조용할 줄 알았던 식사시간도 아이들의 말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두부 좋아한다?"
어디선가 들리는 자랑소리에 다른 아이들이 ‘나도 나도‘ 하며 두부를 집어든다. 기특한 녀석들. 한 명이 먹으면 나머지가 따라먹는, 기분 좋은 현장이다. 나도 선한 영향력을 주고자 파프리카를 집어 들고는 말했다.
“이거 봐라? 난 파프리카도 잘 먹는다?”
밥을 먹고 난 후 퍼지는 오르골 소리에 낮잠을 푹 잤다.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꺼풀이 무섭도록 무겁게 내려오더니, 자리에 눕는 순간 바로 잠에 빠졌다. 눈을 뜨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가 우리 집 천장이 보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으니 어린 내 친구들이 배시시 웃으며 잘 잤느냐며 묻는다.
"응! 잘 잤어!"
'내 아들과 잘 지내주어 고마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띵동-”
이제 막 오후 간식을 다 먹었는데, 엄마가 오셨단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다. 내가 보고 싶어서 일찍 왔나 생각하니 기쁨에 몸이 덩실거린다. 어린이집에 잠시 있었을 뿐인데 정말 아들이 된 듯하다.
“그렇게 좋아~?”
양말을 신겨주시던 선생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하원을 시킬 때마다 벨을 누르고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들리던 노랫소리가 떠오른다. 이걸 부를 차례인가 보다.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빨리 하원해서 좋다는 표현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엄마가 좋고,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어린이집에 와서 엄마 생각이 든 적은 거의 없었다. 재밌게 놀고, 관찰하고 분석하느라 나름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엄마가 문 앞에 와있다니 너무나 그립다. 문이 열리면 그리웠던 엄마를 눈에 담고, 꼭 안아줄 것이다.
“끼익-”
문이 열렸다. 내 앞에 서 있을 엄마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어린이집 열린 문 틈에 서서 아들이 개구지게 벙싯벙싯 웃는다. 그 눈동자 속에 원래대로 돌아온 내 모습이 비친다. 내게로 안기는 아이를 어느 때보다도 꼭 안아준다. 그리고는 보고 싶었던 내 아이를 다시 꼭 안아주었다. 너의 안에서 보냈던 특별한 나의 하루, 너에게는 어제와 같았을 하루. 나의, 너의 그 하루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