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7)
베르그손에 따르면 기억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습관적 기억과 자발적 기억이다. 습관적 기억은 흔히 말해 습관처럼 습득된 기억이다. 예를 들면, 쳇바퀴 돌듯 업무를 처리하는 직장에서의 기억이다. 혹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다. 반면 자발적 기억은 습관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것, 그 어떤 기억과도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기억이다. 예를 들면, 설렜던 첫키스나 연애 편지에 대한 기억 혹은 엄마가 해 주었던 따뜻한 밥에 대한 기억 등이 그것이다. 베르그손은 습관적 기억과 자발적 기억을 학습 (더 정확히는 단순 암기)과 특수한 독서에 빗댄다.
"학습의 기억은 외워서 습득된 것인 한 모두 습관의 성격을 가진다. 습관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동일한 노력의 반복에 의해 습득된다. 습관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동일한 노력의 반복에 의해 습득된다. 습관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전체 행동을 우선 해체하고 다음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신체의 모든 습관적 훈련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추진력이 전체를 흔드는 기제 속에, 동일한 순서로 이어지며 동일한 시간을 점하는 자동적 운동의 닫힌 체계 속에 축적되었다."
"반대로, 한 특수한 독서의 기억, 가령 두 번째나 세 번째의 독서는 습관의 성격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상은 반드시 처음부터 기억에 새겨지는데, 다른 독서는 정의 자체에 의해 다른 기억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애의 한 사건과 같다. 그것은 날짜를 지니며 따라서 반복될 수 없음을 본질로 가진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41 p.
습관적 기억은 인간이 가진 절대적인 조건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시작점이기도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기억의 창고를 자발적 기억으로 채우고 싶다. 사실, 이제 나에게는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 많아졌다. 나는 그 기억들을 딛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간다. 현재 상황이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절망에 쉽사리 무릎 꿇지 않는다. 그건 나에게 소중한 기억들을 만들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년 생일 때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동생에게 편지를 받았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편지였다. 그 친구의 정성이 다이어리 한 권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2020년부터 내가 썼던 글에 달린 소중한 사람들의 애정이 담긴 댓글들과 스승의 글들 그리고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썼던 글들이 그 친구 특유의 야무짐이 뭍어나는 필체로 소복히 옮겨 담아져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편지를 적어 왔을까. 작년 말즈음 이 친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변화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루를 열흘처럼 살았던 탓일까. 그 때만큼 그 친구와 자주 만났던 때가 없었는데도 만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의 하루를 버텨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없는 시간을 짜내어서 나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편지를 선물해 준 것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재인 (식별) 한다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를 다시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재인의 과정을 통해 과거의 대상과 현재의 대상을 끊임없이 대조해가며 현재의 대상을 지각한다. 즉, 우리가 관심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심리 상태가 '재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인에는 '방심에 의한 재인 (reconnaissance par distraction)'과 '주의하는 재인 (reconnaissance attentive)'이 있다.
'방심에 의한 재인'에서의 '방심'을 일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원어인 reconnissance par distsraction에서 그 뜻을 유추하는 편이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reconnissance는 '주의', par 는 '~에 의해서', 그리고 distraciton은 '혼란, 산만'을 의미한다. 조합해보면 이는 주의가 혼란해지는 상태에서의 재인을 의미한다. 즉, 주의가 필요하지 않은 재인이다. 예를 들어, 처음 간 지역에서는 길을 헤매지만 익숙해 진 다음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길을 찾을 수 있게 되는 상황 같은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돌맹이와 쌀밥 중에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상황을 들수도 있다. 이는 긴급한 삶의 필요를 위해 식별하는 행위이며 단세포 생명적이고 기억이 현재 지각과 결합하지 않는 재인이다.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행하는 자동적 재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주의하는 재인 (reconnaissance attentive)'은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주의를 기울여서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처음 해 보는 운동을 하는 경우나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는 계속 끌리고 매혹되지만 전에 만나본 적 없던 유형의 사람을 계속해서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거시적인 삶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다세포 생명적이며 기억이 현재 지각과 규칙적으로 재결합하는 재인이다. 삶의 진실로서의 존재자 일반들은 모두 진동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주의를 기울이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려 할까? 사랑하는 존재를 대할 때이다.
나에게 편지를 주었던 그 친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었다. 본래도 눈치가 빨랐던 그 친구는 나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분위기의 변화 카톡 말투의 변화 등을 미세하게 캐치해 내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최고의 것들을 나에게 해 주려고 했다. 무작정 잘해주기만 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선물 공세만 하거나 늘 웃는 얼굴로만 나를 대하거나 했다면 오히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었을테다. 그 친구는 나의 마음의 날씨에 맞는 모습으로 찾아와줬다. 내 마음에 햇볓이 쨍쨍하면 만사 제쳐두고 함께 소풍을 가 주었다. 내 마음이 꽁꽁 얼어붙으면 자신의 온기로 꼭 안아 주었다. 내 마음에 폭우가 내리면 전화를 걸어 아무말 없이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내 마음에 부슬비가 내리면 가만히 다가와 함께 비를 맞아 주었다. 내 마음에 소낙비가 내리면 우산을 들고 달려와 주었다. 내 마음에 여우비가 내리면 함께 웃는 얼굴로 울어주었다. 내 마음이 건조해져서 갈라며 피가 흐르면 눈물을 흘려 적셔 주었다. 헛발질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고 나서 보면 그 때 그 친구의 마음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나에게 필요한 형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그 친구의 마음에 비해 나는 늘 방어적이고 도망갈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 친구는 나의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고 나의 슬픔에 진심으로 함께 슬퍼해준다. 나보다 더 기뻐해주고 나보다 더 힘들어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늘 미안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친구의 마음이 무겁고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종종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내 마음의 방으로 기어들어가곤 한다. 그런 때면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 친구가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을 읽고 감응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서 속상하고 지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비겁하고 겁쟁이였던 나는 이 친구를 잃는 것이 겁이 났다. 정말로 이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이 나를 떠나갈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웠것 뿐이었으니까. 이 친구가 나 때문에 받았을 상처나 마음 고생에 나는 감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그건 이 친구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는 나의 닫힌 마음과 미숙한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의 분명한 지각은 진실로 닫힌 원에 비견될 수 있으며, 그 원 속에서 지각상 (image-perception)은 정신으로 향하고 기억상은 공간으로 던져져서 서로가 서로의 뒤를 좇아 달린다."
"이 마지막 요점을 좀 더 살펴보자. 사람들은 기꺼이 주의하는 지각을 유일한 선을 따라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표상한다. 그리하여 대상은 감각을 자극하고, 감각은 자신 앞에 관념들을 나타나게 하며, 각 관념은 지적 덩어리의 더 후퇴한 지점들을 점점 더 가깝게 진동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정신이 대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서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게 되는 직선상의 진행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반성된 지각은 하나의 회로 (circuit)라고 주장하며, 거기서는 지각된 대상 자체를 포함한 모든 요소는 전기 회로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호 긴장의 상태에서 유지되고 있는 결과, 대상으로부터 출발한 어떠한 진동도 정신의 깊은 곳에서 중도에 멈출 수가 없다. 즉, 그것은 항상 대상 자체로 돌아와야 한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97 p. - 198 p.
베르그손의 개념 중 '8자도식' 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주의 깊은 식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베르그손이 만든 개념이다. 8자도식을 나타낸 그림을 살펴보면 지각하고자 하는 대상 O를 중심으로 위쪽으로는 A ,B, C, D의 실선 원이, 아래 쪽으로는 B', C', D'의 점선 원이 점점 부풀어간다. 여기에서 A, B, C, D는 기억을 의미하고 B', C', D'는 잠재적 대상, 즉 대상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지각하고자 할 때 대상 O에 가장 근접한 기억 A를 떠올린다. 이는 필연적으로 오해와 편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그 다음으로 가장 근접한 기억 B를 떠올린다. 그 때 그 사람에 대한 인식 B' 가 생긴다 (A도 아니고 B에 가까운 그 사람). 그러나 한 존재를 진정으로 지각하는 과정은 한 두가지의 기억만 가지고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억 C, D ,E... 등을 소환하게 되고 각자 소환된 기억에 따른 인식 C'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에 가까운 그 사람), 인식 D'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D에 가까운 그사람) 등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하여 알아간다.
"주의의 행위는 정신과 대상 사이에 너무나도 강한 유대를 내포하고 그것은 너무도 잘 닫혀 있는 회로이기 때문에 첫 번째 회로를 포함하며 감지된 대상 이외에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그만큼의 새로운 회로들을 조각마다 모조리 다 만들지 않고는 더 높은 집중의 상태로 이행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98 p.
이 때 기억과 인식의 원은 폐쇄회로이다. 왜냐하면 지각된 대상 자체를 포함한 모든 요소는 상호 긴장의 상태에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출발한 어떠한 진동도 반드시 대상 자체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원숭이'라는 동물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동물이 어떤 동물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억들을 떠올려야 하며, 그 떠올린 기억속 대상과 원숭이가 일치하는지 대조하기 위하여 언제나 원숭이를 참조점으로 두어야 한다. 따라서 주의하는 지각은 직선적이지 않다. 주의하는 지각을 도식화하면 닫힌 회로들이 대상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부풀어가는 형태, 즉 숫자 8의 형태로 그릴 수 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우리는 오해와 오해를 쌓아오며 지금 이 관계까지 왔다. 관계에도 모양이 있다면, 이 친구와의 관계의 모양은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쉬지 않고 변해온 것 같다. 돌아보니 그 과정이 모두 기억의 회로를 돌리며 대상을 재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나의 기억의 원에 갇혀 있는 고착 상태는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야기했다. 종종 그런 상태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타인과의 마찰에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봉착하면 대화를 차단하고 내 마음속의 굴로 도망가버리는 편이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친구가 용기 있게 내민 손 덕분에 조금이라도 내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 대하여 알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던 덕분에 나도 나의 진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원 B, C, D가 기억의 더 높은 확장을 나타냄에 따라 B', C', D'에서 도달된 그것들의 반사는 실재의 더 깊은 층을 나타낸다."
"주의의 노력에서 정신은 항상 그 전체가 주어지나, 자신의 진전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수준에 따라 단순화되거나 복잡화한다. 보통은 현재의 지각이 우리 정신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이 채택하는 긴장의 정도에 따라, 그것이 위치하는 높이에 따라, 지각은 우리 속에서 다소간 큰 수의 상기억을 전개한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99 p.
아직도 서로에 대한 많은 오해를 하고 있고 이 친구의 마음을 잘 못 읽는다고 느낄때가 숱하게 많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들을 넘기고 보니 그 이전에 비해 이 친구와 가까워 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마음이 울렁거리곤 한다. 우리의 마음이 힘들었던 만큼 그 상태를 견디려 했던 노력이 서로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깊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 친구의 마음에 다가갔던 것보다 그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주었던 적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말이다. 그 친구가 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편지에는 그 친구가 나의 마음을 한 톨이라도 더 느껴보고자 애를 쓰고 애를 썼던 시간들이 꾹꾹 쌓여있다.
최근 내가 이 친구를 밀어내려고 했던 때, 그 날 그 친구를 만나고서 알았다. 나 이 친구에게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힘들 때 그 친구가 준 편지를 다시 읽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썼던 글들을 통해 그 때의 감정이 다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때는 나의 마음의 그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힘겨웠는데, 자세히 보니 내 그림자가 더 작고 쓸쓸했던 너의 그림자를 덮어버려 네가 거기 있음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너는 늘 나를 잘 못 읽는다며 미안한다. 나에게 네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한다. 내가 울 때 나보다 더 마음 아프게 울어주었다. 정작 나는 내가 불을 지핀 너의 고통과 날 바라볼 때 흔들리는 너의 눈동자를 피하고 외면하고 있는데. 그 날 이 친구 앞에서 서투르게 동여매었던 마음을 우악스럽게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잔잔해진 내 마음을 보고, 미안했고, 고마웠다. 너에게 내 짐을 짊어지우고 싶지 않다는 거짓말로 너를 아프게 했고 외롭게 했고 지치게 했다.
"그런데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하지 않는다. 요구된 운동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하나씩 적시되고 전체가 함께 재구성되기를 요구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세부도 무시하지 않는 완전한 분석과 아무것도 축약하지 않는 현실적 종합이 필요하게 된다. 나타나기 시작한 몇몇 근육 감각들로 구성된 상상적 도식은 소묘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리고 완전히 체험된 근육 감각은 그것에 색체와 생명을 준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209 p.
그 많은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들에 그 친구가 한 발자국이라도 더 혹은 손 한 번이라도 더 내밀어 주었기 때문에 그 친구와 나 사이에는 이제 제법 많은 기억-인식의 원이 축적된 것 같다. 우리가 느낀 마찰열의 그 열기가 서로를 느끼고 체험하는 근육 감각을 깨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기는 우리의 마음을 크고 작게 달궜던 딱 그 만큼의 뜨거움이었다. 생략은 없었다. 몸과 몸이 만나서 내가 느꼈던 만큼 나는 변했고 그 친구도 변했으며 우리의 관계가 변했다. 처음 그 친구와 관계 맺었을 때 우리의 관계는 크로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색체와 생명을 띈 수채화가 되어가고 있다.
내 주변에도 나와 같이 마음의 문을 닫고 타자와 마찰이 생기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왜 그런 상태가 되었을까? 나의 마음을 돌이켜보니 알겠다. 나는 누군가를 절절하게 기다려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차갑게 닫힌 너의 마음의 문 앞에서 몇날 며칠을 홀로 기다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문을 닫기 전에 내가 먼저 문을 닫겠다는 마음. 그래서 기다림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런 상태에서 누구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문을 닫은 채로 만나는 타자는 온통 스케치일 뿐이다. 나는 진짜 그림을 그린적이 없었다.
"어떤 상을 찾기 위해 우리 과거의 삶의 경사를 거슬러 올라갈 대마다 우리는 그리로 (습관적 기억) 피난처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각은 발생 중의 행동으로 연장되며 상들이 일단 지각된 후 그런 기억으로 고정되고 일렬로 배열함에 따라, 그것을 계속하던 운동들은 유기체를 변화시키고 신체에 새로운 행동의 성향을 창조한다. 이처럼 신체에 놓이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이 형성된다. 그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점점 더 다양하고 더 다수의 반응을 가진, 끊임없이 증가하는 수의 개입이 가능하도록 완전히 준비된 대응을 갖춘, 완전히 축조된 일련의 장치들이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44 p.
"반복의 진정한 효과는 우선 해체하고, 다음으로 재구성하며, 그리하여 몸의 지성에 말을 거는 것이다. 그것은 각가의 새로운 시도마다 말려들어간 운동을 펼쳐낸다. 매번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간 새로운 세부로 몸의 주의를 불러들인다. 반복은 몸이 나누고 분류하게 하며, 몸에게 본질적인 것을 강조한다. 전체 운동에서 그 내적 구조를 표시하는 선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한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이해하자마자 운동은 습득된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208 p.
베르그손은 습관과 반복에 대해 주목한다. 인간은 습관이라는 정신적-육체적 지면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습관은 시작점이자 한계점이 된다. 여기에서 베르그손은 반복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다. 반복의 진정한 효과는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몸의 지성에 말을 거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세부를 재발견한다. 그것들을 몸이 이해하자마자 운동이 습득된다. 새로운 행동의 성향을 창조한다. 즉, 새로운 존재로 진화하게 된다.
앞으로도 그 친구에게 실수를 저지르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잦을 것이다. 나의 습관이라는 중력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관계가 계속 변해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너와 나를 더 씩씩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루하고 조바심나기만 하던 반복의 나선 계단 한 칸 한 칸이 참 고맙고, 소중하다. 산에 오르기 전 가벼운 무거움과 담담한 설레임이 느껴진다. 그 친구가 나를 기다려 주었듯 나도 그 친구를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마음은 그 친구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 둘의 관계가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친구와 내가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는 몇 년 사이에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었다.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들을 잘근잘근 견디며 혹독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습관적 기억이라는 피난처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기에 이 친구는 매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고 괴로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희망이나 낙관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뿐이다.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 현재 타자기를 두드리는 이 감촉같이, 너무나 당연해서 '당연'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내일이면 이 친구는 작은 매듭을 하나 짓고 새로운 시작 앞에 서게 된다. 아메바의 촉수 하나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너의 이마에서 더듬이가 솟아나고 열심히 머리를 찧으며 가는 너를 본다. 눈이 생기고 날개가 돋아서 꽃처럼 날아가는 너를 본다. 꽃은 이미 너의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