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인정투쟁
명예는 타인에게 칭찬 받는다고 우리가 표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위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 『에티카』 스피노자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이다. 인간 자체는 인정 행위로서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이 바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극복한다. 즉, 인간은 인정행위다. - 『인정투쟁』 악셀 호네트
나는 돈보다는 명예와 권력에 약한 사람이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 광선의 끝을 따라가보면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이라는 광원에 도착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철학자들은 인정 즉 사랑 받으려는 행위 자체는 인간에게 필연적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인정욕구의 철저한 부정이나 과도한 긍정이 문제인 것이다.
과거의 나는 인정욕구를 과도하게 긍정했다. 즉, 모두에게 아무에게나 인정받고 싶어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이는 '야심' 이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시기와 관심, 찬양, 찬탄을 받으려는 욕망, 얼굴없는 타자들을 향한 명예욕. 나의 야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본다.
나는 교수나 학자가 되어서 사람들의 존경의 눈빛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만났던 교수들의 대부분은 허접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이유에는 내 전공이 순수 자연과학이 아니기도 했고 산학의 상호 의존도가 다른 전공보다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도 있다. 교수들의 업무는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이다. 내가 본 교수들 중에서는 이 둘 모두는 고사하고 하나라도 진정성 있게 해내는 교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수업, 과제, 시험의 수준은 처참할 정도로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그마저도 대학원생 조교들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수업이 돌아갈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열심히 했던 교수들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국가 과제 중에서도 연구비를 많이 주는 과제나 본인에게 콩고물이 떨어질 것 같은 기업과제를 따내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떤 교수는 대놓고 골프나 술접대를 받고 특정 기업에 유리한 실험 결과를 내놓는 편파적인 연구를 밥먹듯이 했고, 어떤 교수는 업계에서 유수 기업이나 공공기관 곳곳에 영향력 있는 자리에 제자들을 꽂아주고는 거들먹거리며 폴리페서 짓을 하기도 했다.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교수들은 대학원생 한두명만 데리고 작은 규모의 연구로 연명하듯 이어가기도 했고, 어떤 교수는 거의 연구실 지박령같은 박사과정 학생이나 포스트닥터에게 학교 일을 떠맡기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 그나마 조교수나 부교수일 때에는 연구에 매진하더라도 정년보장을 받는 정교수가 되면 연구나 교육에도 소홀해지고 교내 및 교외 정치에만 몰두하고 특히나 대학원생들에게는 무소불위의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내가 대학원생이던 시절에도 지도교수를 통해 다른 학교의 교수들도 많이 만나 보았었지만, 업계에 나와서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에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탁상공론에 갇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학회에 후원을 많이 해 주는 기업에 고개를 숙이거나 대학원생들을 본인의 위세를 넓이기 위해 이용하는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좋은 교육자도 좋은 연구자도 아니었다. 교수라는 명예로 비루하게 편의를 도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학교에 있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뒤에 대고는 교수가 아니라 장사꾼이라는 둥, 제대로 실험은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둥, 저런 사람 밑에서 학생들이 뭘 배우겠냐는 둥 뒷말이 많았지만 그들을 거쳐야만 통용될 수 있는 공신력을 얻기 위해 앞에서는 교수님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종류의 명예로움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명예라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아니, 자신만의 세상에서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명예로운 학자이자 교육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나본 명예와 맞닿아 있는 권력자들은 모두 그랬으니까.
나는 그런 명예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고귀하고 진정한 명예를 얻기를 바랐다. 만약 내가 학자가 된다면 나는 진정한 진리를 탐구하는 순수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자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응용과학이 아니라. 가짜 존경과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을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이십대 때의 나는 돈과 자본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돈이라는 걸 벌지 않아도 되었던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형성되었던 나의 유아적이고 유약했던 생각이었다. 사실은 내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이 두려웠던 거였으면서 돈보다는 고귀한 명예를 쫒는다고 나를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합리화를 하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서 내 힘으로 밥벌이를 하고자 취업을 했다. 사실 나는 직장을 정당한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남들이 한 번씩 겪는 취업과정의 고통을 나는 하나도 느껴보지 않고 외국계 대기업에 취업했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할 무렵 마침 현재 직장에 신입사원 자리가 났고 업계에 영향력있고 발이 넓었던 실험실의 연구교수님이 나를 그자리에 추천을 해 주신 거였다. 나를 뽑았던 상사, 나를 추천해줬던 연구교수, 나의 지도교수 세 명은 같은 지도교수 실험실에서 학위를 했던 선후배 관계였다. 물론 채용과정은 공채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나 말고도 지원자가 서너명 더 있었지만, 한국지사에서 나는 내정자였기에 가장 크리티컬하게 작용하는 면접에서 나에게 유리하도록 손을 썼고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채용이 되었다. 나는 내가 다른 지원자들보다 우수하거나 더 노력을 해서 뽑힌것이 아니었다. 낙하산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다른 산업계보다 학연이 더 끈끈한 축산업계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사실이 나는 치욕스럽고 부끄럽다.
만약 내가 그 당시 정말로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했다면 그 자리를 마다하고 내 힘으로 취업을 해 보려고 노력했을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기도 했으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외국계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업계에는 괜찮은 국내 대기업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했었어도 나는 둘 중에 외국계를 선택했을 것이다. 국내 대기업은 급여를 조금 더 주겠지만 허영심이 많은 나에게는 외국계라는 이미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나는 명예와 사회적인 인정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한동안 나는 우리 회사를 다니는 스스로가 우쭐할 때가 꽤 많았다. 여의도 한복판에 깨끗한 사무실에서 회사에서 주유비를 내주는 법인차를 타고 다니는 내 모습이 말이다. 우리 회사는 사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대부분 영어로 하고 특히나 내가 맡았던 업무는 외국의 본사직원들과 일을 해야할 경우가 많아서 출장도 꽤 잦은 편이었다. 외국 직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곳곳을 누비며 그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법인카드로 비싼 식사비를 턱턱 긁어대고, 출장을 가서 좋은 호텔에서 묵는것, 국제 세미나나 컨퍼런스에서 우리 회사의 커다란 부스에서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문화와 인종의 직원들이나 고객들과 교류하는 것들을 아닌 척 했지만 우쭐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가끔 내가 졸업한 실험실 지도교수나 학생들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 있어 방문하면 지도교수가 겸연쩍어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후배들이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즐겼었다. 부모님이 나를 기대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때로는 자랑스러워 하신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사회에서 그래도 인정받는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안도감이 들고 자랑스러웠다.
직장 내에서 나의 위치도 그렇다. 지금 나의 자리는 관례적으로 석사 학위 이상의 학위가 있는 사람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을 처음 들어올 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나는 운이 꽤 좋아서 나의 인사고과가 영업실적과 완전히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있지 않은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부서의 실적이 점점 안좋아질때라 나는 무조건 영업부서로는 빠지지 않겠다고 버텼고 외국계 기업이라 고결한 척을 하며 직원들의 의사를 존중 해준다는 명목 때문이었는지 그런 나의 의견은 존중되어 왔다. 우리 회사는 싱가폴이나 유럽 본사 매니지먼트 그룹이나 기술담당자들은 실질적인 현지 상황에 대한 지식이나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적용방안에 대해서는 전무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로컬 직원들을 감시하고 쪼는 기형적인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고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인데, 나는 본사 직원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아왔다. 나의 직무상 내가 조금이라도 개입되지 않는 프로젝트가 없기도 하고 실제 고객을 만나는 일은 영업사원이 주로 했기에 나는 중간에서 적당히 일하는 척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런 자리에 있다는 사실도 은근히 즐겼다. 어찌보면 근본적으로 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허영심 있고 비겁한 성격이 외국계 기업의 글로벌 팀의 성격과 잘 맞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신입사원 시절을 거치면서 만 4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일종의 팀장과 유사한 자리를 맡게 되었다. 조그만 조직이라 팀원이라고 해 봤자 1명이지만 사장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할것을 요구해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영업사원들에게 내가 무슨 수로 이래라 저래라 하겠냐만은 어쨌든 나에게 독립적인 결정권을 준 만큼 나의 역량을 인정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사가 멍청하거나 무능력하면 좋은 점이 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면 그와의 힘싸움에서 내가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것이다. 내가 유능하지는 않았어도 그들보다는 실무를 상대적으로 많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지식들이 있었고 나는 그걸 잘 이용해왔던 것 같다. 요새 나는 직장생활을 이렇게 해도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내 마음대로 하고 있다. 신기한 경험도 많이 했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관계에서 사람들은 능력 여부에 상관없이 웃는 얼굴이거나 착하게 대할수록 더 함부로 대하고 무시한다는 사실. 능력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리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도 피해의식이나 억울함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사실. 일을 적당히 대충하고 관계도 적당한 선에서 맺는 것이 직장내 평가에서는 더 유리하다는 사실. 직장에서의 관계도 모두 힘의 의지의 싸움이고 기세 싸움이라는 사실. 물론 이는 정규직 직장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테다. 만약 내가 일용직 혹은 계약직이거나 사업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질것이다. 적어도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직장내에서 발생하는 마찰들을 버텨낼 힘을 길러냈고 나름대로 버티고 싸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이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일의 양이 점점 많아져서 내 자유시간을 침범당하는 것도 힘겨웠지만 매일 회사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일요일 밤이면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것도, 아침에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직장 일 생각에 시간 활용을 못하는 것도, 운동하러 갈 때즈음이면 피로에 지쳐서 체력을 쥐어짜내는 것도, 회의를 위한 소설같은 자료를 만드는 것도, 궁금하지도 않은 상사의 아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매주 오는 외국인들을 맞이하는 것도, 큰 규모의 세미나를 열어서 고객들 앞에서 있어보이는 척 거들먹거리는 것도, 서양애들이 말로만 떠들어대는 콜을 몇시간 간격으로 듣는것도 지겨웠다. 돈이 되기 때문에 투자하는 것이면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해야 하는것도 지겨웠다. 답도 없는 회의를 하루 종일 하는 것도. 쓸데없이 비싼 호텔로 워크샵을 가거나 쓸데없이 비싼 레스토랑에서 회사돈으로 사먹는 거면서 고급스러운 척 하려는 인간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회사돈으로 번지르르한 유럽이나 휴양지에 국적기를 타고 출장가는 걸로 누가 가네 마네 기싸움 하는것도. 그깟 해외여행 음식 골프 접대한번 받겠다고 다 큰 어른들이 삐지고 갑질하는 꼴을 눈 뜨고 봐야 하는것도. 자기 혼자 잘난 사람들이 수두룩빽빽한 곳에서 귀에서 피나도록 자기 자랑 듣는 것도. 회사에서 주식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아이들 교육 이야기 강남 목동 이야기 골프 이야기 듣는 것도. 더 이상 직장에서 무능력하다고 욕먹는 것도 칭찬을 받는 것도 아무런 감각을 선사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나는 점점 회색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사장이나 상사가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며칠 걸러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무직에 백수 30대 중반의 여자는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일까. 나는 딱히 특출난 기술도 자격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집이나 차는 고사하고 모아둔 돈도 퇴직금을 제외하면 거의 없고 참 유감스럽게도 경제관념도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들에게 내새울 수 있었던 거라면 석사학위와 외국계 기업 과장이라는 타이틀이었지만 그것을 계속 쥐고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든 슬픔을 준다. 만약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한다면 나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부모님이 알게 되어서 나를 부끄러워한다면 더 이상 나를 미더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나부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그 무게에 눌려서 기쁨을 좇을 힘을 내지 못하면 어떡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 수가 현저히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얼굴 없는 타자들을 향한 명예욕이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현재의 나는 직장에서 겪는 경멸과 증오와 멸시로부터 오는 슬픔이 다른 것들을 시야에서 가려버려서 소극적 도피를 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슬픔이 줄어들고 나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서 오는 슬픔이 더욱 커져서 그것이 나를 압도할수도 있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하면 한 가지 길은 사라지는 법이다. 나는 다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