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작가님의 추천으로 무나 작가의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는 지하 1층부터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찰랑> 이라는 그림을 마주했다. 별안간, 눈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저 물결이 찰랑하듯 가슴언저리가 애이며 눈물이 흘렀다. 오른편에 있는 <빛나는 마음> 이라는 그림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게 빛이 나서 그저 안타깝고 아쉽고 섭섭하고 또 딱하고 한스러웠다. 아스러지는 빛의 줄기와 그것에 비추이는 맑은 얼굴들을 보니 마음이 울렁였다. 1층 전시실의 영상 <너의 기분 속을 헤엄치다> 에서 너의 감정-파도에 내 심장도 함께 출렁여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얼굴 모양의 섬에 홀로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너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네가 외로이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너의 기분을 흠칫 느끼고 만다. 그것에 압도될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프고 또 절망한다. 네 마음에 빛 한줄기라도 위로가 되는 달빛을 함께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층 전시실에서 <고독의 질감> 이라는 그림과, 마치 너의 심장을 도려내기라도 한 듯 검은 액체를 두 손 가득 소중히 모아든 채 너의 가슴 위에 얹어 놓은 그림을 마주한다. 동굴속을 들어가 바위 사이에서 수많은 너와 내가 옹송그리고 있는 <바위되기>를 보았다. 흐르는 시간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것이 멈춰있다. 뭉툭하고 둔한 바위가 나의 가슴을 천천히 파내고 있는 것 같은 고요하고 잔인한 감각을 느끼며 여러 그림 앞에서 머무르고 서성였다.
나아가고 싶다.
주춤거리는 두 발을 떼어 딛고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할퀴었던 상처들이 따끔거린다. 나는 내가 너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사실을 안다. 온 세상이 지뢰밭 투성이고 나는 움츠러들고 멈칫거린다. 나의 사랑은 이토록 허름하다. 사랑이라고 감히 이름 붙일수도 없을만큼.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한다. 나는 홀로 섬에 갇혀 달빛에 몸을 쪼이고 있는 너를 바라본다. 온몸은 축축히 젖었고 온 사방은 어둡다.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거리며 나를 덮쳐온다. 너는 외로움과 고통속으로 뛰어들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나는 비로소 그런 너를 본다. 아니 보고 싶다. 위선과 기만으로 뒤덮인 나에게 제발 고통을 허용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기도하듯 마주앉은 너와 내가 보인다. 고개 숙인 너에게 나는 다가가 손을 뻗고 너를 느끼고 흠칫 놀란다.
퇴사를 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선택이라 담담한 기쁨이 있다. 정말 회사를 나와보니 이제까지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영화관에 가면 항상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시작될 때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오곤 한다. 마치 미뤄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 같은, 동일한 영화이지만 전혀 다른 영화가 펼쳐지는 것 같은 새콤달콤한 맛이다. 나에게는 퇴사가 그런 맛이다. 후회할수도 있고 후회하지 않을수도 있다. 앞으로 더 큰 풍랑을 만나 좌절할수도 있을 것이다. 꺾이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을 정갈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나는 오늘 하루의 기쁨을 위해 자글자글한 조약돌을 모으는 마음으로 산다. 살아간다. 살아갈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런데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나의 세상에는 나뿐이 없었으므로. 쓰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세상은 볼품없고 초라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신비롭고 알싸하고 씁쓰름하고 때론 무시무시하고 구역질이 나는 이야기들. 이제서야 나는 비로소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성큼성큼 아무렇게나 걷던 걸음걸이가 부끄러워질만큼 옴짝달싹도 못할만큼 아름답고 애가 타는 이야기들. 그것들에 몸을 푹 적시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진솔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그 고요를 응시하고 싶다. 찰나의 순간의 빛을 그리고 어둠을 비춰보고 싶다. 흑과 백으로 일렁이는 물 속에 반쯤 잠겨있는 묵상하는 두 인물처럼, 찰랑이고 싶다.
좋은 삶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