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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Dec 13. 2024

내 안의 폭력성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에는 '폭력'이 있다. 그녀는 질문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그녀의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가 실톱이 되어 가슴을 베었다.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언어를 바로 듣기 위해서는 내 안의 폭력을 고발해야 했다. 함부로, 폭력을 행하는 타인을 비난하거나 폭력을 당한 타인의 고통을 느끼거나 공감하고 아파할 수 없었다. 그것의 양면이라고 하는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 대해 나는 감히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조히스트였다. 나는 나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에게 나는 분노하지 못했다.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쌓여온 내 안의 폭력성은 해소되지 않고 부풀어 오르고 곪고 썩었다. 그 폭력들은 내부로부터 파괴해나갔다. 때로는 터져나가 나보다 더 약한 자들을 파괴했다. 나쁜년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럴수록 나에게 폭력을 가해줄 대상을 찾았다. 폭력은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의 즙은 쾌락이었다.


동시에 나는 사디스트이기도 했다. 그걸 느끼던 순간 무서웠다. 그 안에서 미친자의 미소를 짓는 환영이 언뜻 비쳤다. 물이 넘칠듯 안넘칠듯 아슬하게 출렁거리는 수조를 정수리에 이고 가고 있었다. 목이 졸리면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의 몽롱함. 내 안에는 아내를 때리는 남편과 맞고사는 아내 둘 모두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열함과 맞물리자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 악이 나에게서 탄생하는 것을 온 몸으로 보았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빛과 실: 2024 노벨문학상 강연 中>, 한강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여러 사람들의 용기와 행동에 의해 긴급한 상황은 우선 막을 수 있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위험과 혼란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크고 작은,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악의 모습들. 그 광경에서 나는 낱낱이 내 모습을 발견한다.


윤석열이 어떻게 해서 그의 그토록 순수하고 결백한 악함을 토해놓을 수 있는지 나는 알 것 같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였다. 내가 아직 살지 않았던 하지만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아주아주 오래 전 그 역시 "나에게도 잘못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실낱같은 깨어짐 위에 먼지가 덮히고 콘크리트와 시멘트가 발리던 순간들을 나 역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눈만 감으면 펼쳐지는 또다른 평행우주를 통해 섬뜩하게 실감한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 길목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한치라도 삐끗하면 순식간에 편리한 길로 고속질주 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장관들과 총리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더할나위 없는 가벼움을 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사함과 비열함 그리고 지독한 옹졸함이 어떻게 거대한 불행과 악을 몰고오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과거에 택했던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선택들이 뒤섞여 나의 불행으로 증폭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너에게 전염병처럼 옮겼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권력과 잇속을 챙기려는 본심을 감추고 국민을 위한다며 핏대세워 외치는 그들의 기만과 위선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빼다박은 나의 발가벗은 알몸을 보았다. 홑겹에서부터 수만 수천겹까지 사람마다 다른 겹의 '진정성'이라는 껍질을 두른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깊은 곳에 은밀히 파뭍어 놓은 나의 탐욕과 집착을 보았다.


죄와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시종일관 모르쇠와 무기력함으로 대응하는 장관들과,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억울해하는 장교들. 그들의 모습에서 무사유의 죄를 저질렀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눈 앞에 버젓히 드러난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하는 그들의 모습 역시도 나의 모습이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무책임한 모르쇠 대답으로 일관하는 그들에게 모두가 분노할 때, 나는 혼자서 두려웠다. 그들을 향해 부들부들 호통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앞에 놓인 피고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촛불 집회에 나갔다. 응원봉 불빛이 알록달록 반짝였고 시민들의 가슴은 뜨거웠지만 나는 그들의 마음에 힘을 보태줄 수 없었다. 나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의 고통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희생에 감사해 본 적도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싸우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뭘 위해 싸우는걸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무지해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도, 어떤 마음으로 싸워야 하는지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부끄러웠지만, 정말 부끄러웠을까. 어쩌면 윤석열처럼 적반하장으로으로 역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다름아닌 나에 의해.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날은 유독 추웠다. 집회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는 아리랑 노래에 뜬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날 썼던 글의 한 조각과 거기에 뭍은 기억들이 내 가슴을 세게 쳤다.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호소하고 위로하고 분노하고 있는 광장 한가운데서. 여전히 나는 나의 손톱 아래의 가시에만 아파하고 있는데, 당장 내가 베어버린 너를 어떻게. 지금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봐 주고 있는 너, 지금 네 곁에 있지만 없는 나로 인해 더욱 외로울 너. 더 신나게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너를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까. 그런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도저히.





내가 처음 읽었던 한강 작가의 책은 『작별하지 않는다』 였다. 그 책을 읽었던 몇 년 전의 밤이 떠오른다. 그날 밤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제주의 숲 속에, 하얀 눈이 쌓인 인선의 집에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것같이 부신 흰 빛의 눈더미,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릴 것처럼 내리는 폭설, 그리고 바람의 단내가 희미하게 풍기는 눈가루의 설익은 냄새. 그 이미지와 느낌들이 눈보라처럼 들이쳐서 코와 입을 막아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던 기억.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언어가 나를 빨아들인다는 느낌. 어지러움에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울렁거렸고 알아챌 할 겨를도 없이 무방비로 눈물을 흘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마음이 달래지지 않아서 새벽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나갔다. 책이 남긴 푸르스름한 빛의 잔상이 내가 보는 세상에 덧씌워졌다. 마치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처럼 그 새벽녘의 공기와 풍경들이 낯설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다름 아닌 나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나 역시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답으로 한강은 작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슨 답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안다. 뒤늦게 홀로코스트나 광주항쟁 혹은 제주 4·3 사건을 공부하며, 나는 그 속에 내가 있음을 보았다. 나는 히틀러였고 전두환이었고 이승만이었다. 동시에 나는 직접 유대인을 쏘아 죽이는 것을 즐겼던 나치 친위대 장교였고,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하며 즐겼던 고문관이었으며,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던 군인이었다. 폭력은 정말, 폭력에는 정말, 그 쾌락에는, 정말로 중독이 될 수 있다. 악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의 가장 날이 선 경사면, 그 테두리의 경계가 순간적으로 가장 흐릿한 곳 면면에서 무수히.


한편으로 나는 진짜 악행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했다. 그들의 불행과 아픔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또 그들의 가족의 가족들, 역사적으로 대물림되는 고통들을 기만했다. 어떤 면에서 나는 히틀러, 전두환, 이승만, 나치 친위대, 고문관, 군인,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같은 두드러지는 '악인' 보다 더 악한 사람이었다. 나는 비겁하고 은밀하게 숨어서 고통을 주고 믿음을 저버렸다. 선명한 악보다 더 나쁜 것은 모호한 악이다.


삶은, 세상은, 세계는, 우주는 참 아이러니하다. 2024년 12월, 군부독재 시절 계엄군에 의해 피흘렸던 학살에 대한 소설이 노벨상을 타는 역사와 독재를 꿈꾸는 권력자에 의해 위헌 계엄령이 선포되는 역사가 포개져서 존재하고 있다. 빠르게 현재를 향해 흘러오는 미래와, 빠르게 과거로 향해 흘러가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그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른 유속에서 한강 작가의 마음에서 뽑아져 나온 금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오랜세월 글을 써오는 동안 변치않던, 모순처럼 보이는 질문 두 가지가.




폭력의 한복판에 있던 그날의 나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여전히, 폭력의 한복판에 있는 지금의 나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쌓였다. 모든 우연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종종 들었다.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새로운 한 조각을 만나면 그 안에서 내가 겪었던 어떤 것들이 운명인 것처럼 나타나는 느낌. 우연이 필연이 된 것 같은 느낌. 하나의 조각 안에 많은 것들이 담겨져 왔고 그것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면서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내 안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한 방식으로 내 안의 폭력성을 해소하는 법을 조금씩 익혔다. 그리고 '악함'은 '약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우쳐 갔다. 무척이나 완만했지만, 그래서 평지나 다를바 없어 보였지만, 그 얕은 경사를 타고서라도 조금씩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멈칫대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너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데, 너를 믿어 주어야 하는데. 견디고 이겨내고 강해져야만 하는데. 어느 부분에 가닿으면 시큰거리는 느낌에 흠칫 놀라 자꾸만 물러서게 됐다. 강렬히 소망함과 동시에 뻐팅기고 저항하는 내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는 왜 자꾸 거기서 물러나? 물러나지마. '내 마음이 이게 맞는건가?' 하면서 거리두지마"


친구가 건넨 말에 마음이 데었다. 여덟 살 어린 날 지었던 사랑의 금실 시를 낭송해주는 한강 작가의 목소리가 유리조각처럼 박혔다.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자격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친구의 저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과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또 다시 타자가 없는 세상 속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또 다시 고통을 기만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며칠 뒤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학살의 현장 중 한 곳에 간다. 그들의 고통을 나는 느낄 수 있을까. 그걸 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라고 느끼고 있는 가식적인 내가 부끄럽다. 부끄럽고 죄송하게도 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그곳에 간다. 나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곳에 간다. 죽은 자들에게 구원받기 위해 그곳에 간다. 부끄럽고 죄송하게도.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가장 깊은 겹은 사랑을 향하고 있던 것 아닐까?
<빛과 실: 2024 노벨문학상 강연 中>, 한강


한강 작가의 글을 필사를 해서 올려두었던 게시글에 친구가 달아주었던 한 줄. 푸른 빛으로 울렁거리는 물그림자에 아래로 비쳐 보이는 금실. 물러나지마. 그래도 싸워야 해. 친구가 건네준 한자락의 실과 소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덧대어져 점점 굵어졌다. 그 희미하게 빛나는 다발들을 가슴에 품는다. 물러나지마,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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