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영 Aug 16. 2022

무의미한 것들에서 의미를 찾는 무의미한 행위

단편

콧구멍을 파고들어 잽싸게 무거운 눈꺼풀을 꽉 움켜쥔 채 뇌까지 당겨 올라가는 커피 향.


초록색 인어 문양이 각인된 하얀 머그잔에 새끼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자 커피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를 구원해줄 바로 그 열정 말이다.


하나, 둘, 하고 셋을 세기 전 새끼손가락을 급하게 땠다.


아직이다.


나는 반대편 손으로 그 뜨거운 열정의 흔적을 어루만졌다.


긴 호흡을 뱉어냈다. 마치 담배 연기를 내뿜듯.


빨리 커피와 담배로 절망 찬 하루를 시작하고 싶지만 때가 아니다.


아직 그대의 열정이 너무도 뜨거워 다가갈 수 없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여정에 열정은 필수라지만, 일정 온도 이상의 열정은 결국 나를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원하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말이다.


적당히 따뜻한 것이 좋다.

따뜻한 것이 오래간다.

오래가야 도착한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그래서 넌 어디가 가고 싶은 건데?”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향해 있던 여자의 찡그린 얼굴이 자신의 옆에 앉은 얼굴을 찡그린 남자를 향하자 더욱더 찡그려졌다.


나는 그녀가 얼굴을 얼마만큼 더 찡그릴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번엔 남자가 자신의 찡그린 얼굴을 창밖으로 향하자 휑한 정수리가 보였다.


찡그린 얼굴의 여자가 더 큰 목소리로 휑한 정수리를 향해 말했다.


“또 그런다. 말을 하라고 좀. 답답해 죽겠네. 내가 고른 곳이 마음에 안 들면 대안을 말해주던가. 그냥 싫다고 하면 나보고 어쩌란 거야.” 찡그린 얼굴의 여자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느꼈는지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의 초점을 흐리며 마치 생각에 빠진 듯 눈동자를 추켜올렸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면 오히려 의심스러우니 이편이 낫다.


그녀는 다시 휑한 정수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찡그린 표정은 이내 증오로 가득 찼다.


그 순간 나는 휑한 정수리 끝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 최후의 생존자 중 하나가 그의 등을 스치고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낙엽같이.


 하지만 떨어져 나간 낙엽의 빈자리는 계절이 바뀜과 동시에 새 주인을 맞지만, 그의 정수리는 새 주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저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그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했던 각고의 노력은 빛을 바란 채 매정한 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찌하겠나, 바로 이것이 현실인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력은 정말로 보이지 않는다.


노력이 결실을 얻었다 해도 사람들은 당신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았다, 또는 재능을 타고났기에 성공을 이루었다,라고 당신의 노력을 폄하해가며 자위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고통스러운 노력 따위를 할 이유가 없어지니깐 말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더라?


“그래서 노력은 해봤어?”

이십대로 보이는 두 남자 중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남자가 나이가 더 적어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는 롤렉스를 차고 있었고, 나이가 적어 보이는 남자는 손목이 비어있었다.


“네? 아. 네... 뭐, 그게, 아니, 뭐, 제 나름대로. 뭐, 그, 한 다곤 했는데, 그게, 뭐, 그렇잖아요. 항상, 저 뭐냐, 그, 생각대로 안된다는 게.” 빈 손목의 남자가 말이 아닌 소리들을 입안에서 작게 웅얼거렸다.


“야. 너는 일단 웅변학원부터 좀 다녀야겠다. 말을 왜 이렇게 먹냐? 아까 밥 덜 먹었어?” 롤렉스를 찬 남자가 조소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빈 손목의 남자는 더 작은 소리로 웅얼댔다.


“야. 변명 좀 작작해라.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맨날 그렇게 열심히 해보지도 않고 좀 힘들어질 만하면 그만두고. 아니면 지레 겁먹어서 시도조차도 안 해보고. 이건 뭐 이래서 별로일 것 같다느니, 뭐 저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너랑은 안 맞을 것 같다느니 하는 바로 그 변명들 말이야. 뭐라도 시도를 해보고 끝까지 버텨봐 좋든 나쁘든 결과가 나올 것 아니냐.” 롤렉스를 찬 남자가 자기가 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기세를 이어 계속해서 멋진 말을 이어가려는데 갑자기 빈 손목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며 말했다.


아니,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말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목구멍 깊숙이 숨어 빛을 볼 그날만을 기다려 왔던 것처럼.


“씨-발!”


그 소리가 매우 커 정수리가 휑 한 남자와 얼굴을 찡그린 여자, 노트북을 바쁘게 두드리던 남자, 책을 읽던 여자, 주문을 받던 바리스타, 주문을 하던 손님, 화장실에서 나오던 할아버지, 화장실로 들어가던 어린아이,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화장실로 가던 어린아이는 놀랐는지 딸꾹질을 크게 하더니 입고 있던 바지에 지도가 생겼고, 점점 그 영토를 넓혀나갔고, 그 영토는 카페의 타일 바닥에 작은 호수를 만들어냈다.


“씨-발!”


아직 못 들은 사람이 있었을까 걱정됐는지 한 번 더.


소니 헤드셋을 낀 채로 옆에서 노랫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노래를 듣던 젊은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빈 손목의 남자를 쳐다봤다.


“씨-발!”


세 번째 소리는 조금 작았다. 마치 마지막 조금 남은 방귀를 마저 뀐 것처럼.


롤렉스를 찬 남자는 눈만 끔뻑 거리며 살짝 입을 벌린 채 정지된 채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마치 정지된 그의 뇌 마냥.


빈 손목의 남자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출구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화장실 앞을 지나치던 찰나, 아이가 만들어 놓은 작은 호수를 밟고 미끄덩하더니 내 커피가 올려진 테이블을 붙잡고 함께 넘어졌다.


아, 내 커피.


이제 충분히 식었을 텐데…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롤렉스를 찬 남자를 노려봤다.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