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백명 중의 하나

그건 바로 내 차지야.

수변공원에서 한창 연애 얘기를 할 때, 그녀는 전 남자친구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의 친구가 그를 대신해서 궁금한 점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헤어졌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랑이 식어서요. 그의 친구는 차마 사랑이 식었다는 문장의 주어를 묻지 못했다. 그녀는 역으로 그와 그의 친구에게 질문을 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얼마 정도 돼요? 백명의 남자가 있으면 몇 명이 좋은 남자에요?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한명이요. 백명 중에 한명 정도는 좋은 남자일 거에요. 그는 그게 바로 그 자신이라는 말은 삼켰다.




그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녀에게 보낼 젠틀하면서도 센스있어 보이는 멘트를 한참 궁리하다가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영화 추천해줄래요? 그녀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족구왕! 인생영화입니다. 꼭 보세요. 그는 아직도식중독 때문에 배가 아파 하루 꼬박 잠을 설친 상태였고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했지만 새벽 4시까지 족구왕을 본다. 영화를 다 본 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빨리 아침이 밝아서 그녀에게 족구왕을 봤다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진다. 아무리 잠이 부족하고 피곤해도 사랑은 사람을 각성시킨다.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카페인이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샤워를 하고 일기를 쓴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들을 만나러 나가길 잘했다고 일기에 쓴다. 그녀와 전혀 다른 사람 둘과 대화를 하는 게 무지 흥미로웠고, 그녀만의 고유한 경험을 쌓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녀는 이별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던 과거와 달리 이별을 계기로 용기를 내고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수변공원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일기에 이렇게 쓴다. 그가 좋은 남자는 백명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 말이 참이라면, 그 하나는 반드시 내 꺼가 될 거야. 왜냐하면 나는 멋지니까! 그녀는 이별에 땅굴을 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나 당차게 걸어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 100% 확신했지만 그 시기가 당분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며 변화를 양껏 누리는 현재에 지극히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분간 연애보다는 도전과 성장에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이 말인 즉슨, 그녀는 그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녀가 일기를 다 쓰고 자려고 눕는데 카톡이 온다. 그가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한다. 그녀도 주변 사람에게 책 추천을 많이 구하므로 이 사람도 좋은 영화를 찾고 싶나보다 생각하며 선톡에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족구왕을 추천해준다. 그녀는 곧 잠이 든다. 그녀는 아주 편안하게 새근새근 잘 잔다. 그녀에겐 카페인의 효과가 없다. 아직은.






그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구나 알게된다. 계속해서 선톡을 보낸다. 족구왕 봤다고, 고백씬이 멋지다고, 재밌는 영화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그녀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쓰는 일기의 제목이 '성장일기'라고 말하자, 그는 화들짝 반가워하며 그도 일기를 쓴다고, 일기의 제목이 '수양록'이라며 공통점을 어필했다. 그녀는 직장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분홍이었다. 그녀의 선배는 그녀를 보고 뭔가 있구나 단번에 눈치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잘잤냐고, 점심 때가 되면 밥 맛있게 먹으라고, 퇴근할 때가 되면 수고했다고 카톡을 보냈다. 그녀는 그가 귀여워서 잠잘 때가 되면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자기 전 두시간씩 전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그와 썸을 타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토요일에 부산에 내려올 거라고 놀아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가 많이 귀엽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선배는 그녀가 이별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의 분홍빛 미소가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그녀의 선배는 그녀에게 남자 보는 기준을 하나 알려주기로 한다. 그녀의 선배는 대학 때 갑자기 관상에 관심이 생겨서 개론서 3권을 통독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그녀에게 말해준다. 관상의 9할은 눈빛이야. 점의 위치나 눈썹의 모양 같은 건 전부 사소해. 눈빛이 초롱초롱한 사람이 있어. 눈이 무지 맑고 깊은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런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 알지? 그거 사이언스야. 그녀는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선배에게 그녀의 눈빛이 어떠냐고 물어본다. 그녀의 선배는 단칼에 대답한다. 초롱초롱해. 그래서 내가 널 아끼잖아.


토요일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괜히 수줍어졌다. 둘은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다가 서로 말을 놓기로 한다. 그가 태어나고 딱 100일 뒤, 그녀가 태어났다. 태어난 해가 달라도 100일 차이는 말을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는 정도다. 그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요즘 '너의 결혼식'이 재밌다고 들었다며 동의한다. 둘은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아 '너의 결혼식'을 본다. 그는 이건 분명히 그린라이트라며 방비엥에서 그녀에게 반한 뒤로 함께 영화를 보는 사이로 발전할 줄이야 감격한다. 하지만 그의 감격은 얼마 가지 않아 꺼져버린다. 그녀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게 만든 장면이 문제였다.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 '너의 결혼식'은 훗날 커플이 같이 보면 안되는 영화로 두고두고 언급된다. 왜냐하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결혼식에 찾아가 신부 대기실에서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다. "덕분에 많이 성장했다. 고맙다. 잘 살아. 많이 많이 행복하구..." 그녀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지난 연애에서 많이 성장했고, 전 남자친구에게 그 점이 정말 고맙고, 그래서 전 남자친구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전 연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을 때가 오면 모든 감정이 정리된 것이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된 상태라는 신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흘린 눈물에 싱숭생숭해졌다.



그녀는 그와 데이트 하는 도중에 운 것이 민망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좋은 영화였다며 보길 잘했다며 이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는 혹시 그녀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를 친구로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걱정이 든다고 해서 움츠러드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전 남자친구가 좋은 남자였다면, 그는 전 남자친구보다 백배는 더 좋은 남자가 될 것이다. 그는 백명 중의 하나가 아니라 만명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먹고 싶어서 미리 찾아본 식당의 메뉴에 대해서 신나게 설명한다. 그녀는 그녀를 위해 미리 분위기 좋은 식당의 맛있는 메뉴를 찾아보는 귀여운 남자를 놓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그의 눈빛이 엄청 초롱초롱하다고, 눈이 참 깊고 맑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힘이 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