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싱크로율 100%

나와 같은 농도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

그는 순수하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호기심과 불도저 급의 추진력이 있다.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순수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순수함을 잃는다. 대신에 그 자리에 귀찮음과 냉소가 자리잡는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끌린다. 그 순수한 에너지가 나에게도 일부 옮겨오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그런 사람을 '반짝이'라고 부른다. 반짝이들은 강력한 자성이 있어서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가 그녀에게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백살까지 순수하게 사는 게 꿈인 사람이다.


그녀는 순수하다. 그녀는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고, 뻔한 장난에도 쉽게 속아 넘어간다.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순수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감탄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다. 무엇을 봐도 시큰둥, 무엇을 하더라도 아무 느낌이 없다. 무미건조해지고 지루해진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다. 그래서 많이 느끼고 많이 감탄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끌린다. 그 열린 마음이 나에게도 일부 옮겨오기를 바라면서. 그는 그런 사람을 예쁘고 착하다고 말한다. 그녀가 그에게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예쁘고 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콩깍지가 아주 두껍게 씌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가을, 그와 그녀는 여의도 불꽃축제를 보러 갔다. 엄청난 인파가 한강을 따라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채웠다. 그녀는 불꽃축제가 처음이다. 그래서 너무 빽빽한 밀도에 불쾌하기는 커녕 신기하기만 하다.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온 힘을 다해서 감탄했다. 옆에 있던 커플이 그녀의 리액션에 박수를 칠 정도로. 그녀는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모든 순간을 꼭꼭 씹어서 소화해내고자 노력한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불꽃축제가 끝나고 어마어마한 인파가 한꺼번에 빠져나려고 하기 직전에, 그는 갑자기 '지하철역까지, 준비 시 땅' 말하고는 지하철 역 쪽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3초간 벙 쪄있다가 지하철 역으로 뛰어간다.


어느 초겨울, 그와 그녀는 경주월드에 갔다. 그들은 수직낙하로 유명한 '드라켄'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각종 매체에서 자주 등장해 유명해진 경주월드는 주말 호황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3분짜리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70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끝말잇기를 하자고 했다. 그녀는 유치하다고 시시하다고 거절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한방 단어를 빌드업했고, 그 또한 치열하게 공격과 방어 전략을 펼쳤다. 끝말잇기를 여러번 한 뒤, 이어서 영화 이름 대기, 초성 게임, 젓가락 게임 등 초딩들이 할 법한 고전 게임을 하면서 누구보다 재밌게 입장을 기다렸다. 뒤에 있던 커플이 그들의 승부를 지켜보면서 '참 재밌게 노네' 부러워할 정도로. 모두가 지루하게 대기하는 동안, 그들은 누구보다 잘 놀았다.


어느 봄,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가방에서 연필과 지우개와 종이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고급 스도쿠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들은 커피값 내기를 했고, 조용히 집중해서 스도쿠만 풀었다. 그는 이겼고 그녀는 졌다. 그는 수에 강하다. 생각하는 속도가 빠르다. 그는 스도쿠가 너무 재미있다며 다음에 또 풀자고 했다. 원래 이기면 재밌는 법이다. 그녀는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가서 혼자 스도쿠를 연습했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절대로 일부러 져준다던가 하지 않는다. 그와 그녀의 세계에서 승부는 냉정한 것이다. 그는 신나게 그녀를 약올린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화가 나면 입술이 튀어나오는 버릇이 있다.


어느 여름, 데이트를 끝내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그들은 역으로 갔다. 여유롭게 대기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TV에 '도전골든벨'이 나왔다. 그들은 간식을 걸고 내기를 했고, 조용히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다. 그녀는 이겼고 그는 졌다. 그녀는 상식문제에 강하다. 지식의 범위가 얕을지라도 범위는 매우 넓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약올렸다. 그는 재도전을 외쳤고, 그들은 매주 일요일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골든벨을 풀었다. 결과는 그녀의 전승이었고 그의 전패였다. 그녀는 절대 일부러 져주지 않는다. 아는 문제가 나오면 가차없이 정답을 외친다. 그리고 정답임을 확인하면 살짝살짝 어깨춤을 춘다. 그녀는 신이 나면 어깨춤을 추는 버릇이 있다.


화가 날 때 입술이 튀어나오거나 신이 날 때 어깨춤을 추는 그녀의 버릇을 그가 알아가면서, 그녀의 사소한 습관들이 매일매일 보고 싶어지면서 그는 어렴풋이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데이트를 할 때  영화관에 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게 놀기 때문이다. 때로는 보드게임을 한다. 때로는 공원 러닝을 한다. 때로는 골든벨을 풀고, 때로는 체스를 둔다. 때로는 카페에 가서 각자 가져온 책을 몇시간 동안 읽는다. 그들 모두 그렇게 노는 게 너무 좋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정의 주파수가 같은 사람이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의 결이 같은 사람이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 상대방도 같은 농도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기적이다. 사람들은 이를, 케미가 좋다고, 쿵짝이 잘맞는다고 표현한다. 그와 그녀의 쿵짝은 싱크로율 100%다.


그는 처음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의심했다. 혹시 그녀가 그를 배려해서 이런 것들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잘맞을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쓸데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보다 그녀가 훨씬 더 즐기면서 이런 활동들을 먼저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 어떠한 사람들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그녀는 가장 좋은 친구다. 소울메이트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나와 똑같은 영혼을 가진 동반자.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같은 주파수로 진동하는 존재. 내가 쿵하면 바로 짝해주는 사람. 싱크로율 쿵짝이 100%인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녀만 예외다.


그는 문득 사는 게 너무 재밌다고 느낀다. 사는 게 너무 즐거워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많이 웃는다. 그가 뱉는 모든 드립이 그녀에게는 세상 웃기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가 된 기분이 든다. 그는 여자를 웃기는 게 남자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를 향해 웃어제끼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꽤 멋진 남자라고 느끼며, 자존감이 높아진다. 어깨가 펴진다. 허리가 세워진다. 그에게는 그녀를 웃게 만드는 일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는 어렴풋이 그녀를 평생 웃게 만들어줘야지 다짐한다. 시간이 갈수록 어렴풋한 생각은 선명해지고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녀에게 청혼한다. 나랑 결혼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포텐을 터트리는 존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