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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an 05. 2019

파리의 시작과 끝

시간을 거슬러, cafe de flore

긴 시간이 생긴 남자는 지도를 펼쳐본다.

사실 남자에게 지도를 펼쳐보는 일은 꽤 자주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설렐 일도 아니었건만, 남자는 지도 위 "Paris"의 빨간 점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파리의 빨간 점은 설렘을 기대로 바꾸고, 기대는 사랑을 엮어 남자를 파리 위에 얹어 놓았다.



초행길이었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생의 처음 파리에 내딛는 발걸음, 하지만 남자의 그것엔 망설임이 없었다. 목적지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 세상의 어느 곳 보다 파리가 빛났던 이유는 그곳에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있어선 이건 여행이라기보다는 소중한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따듯한 여정에 가까웠다.

파란 파리의 하늘 아래, 그렇게 남자의 발걸음이 향했던 방향은 여자였다.


2년 만에 다시 여자를 만난 남자는 여자의 옆 방에 짐을 풀었다. 아직까지 사랑은 남자에게만 사랑이었으므로 한 방을 쓸 수는 없었다. 자기에게만 커다란 마음을 앞세워 여자의 영역에 포함되기엔 여자는 아직 남자의 먼 곳에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인시켜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멀어져 있던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사실 2년 전 첫 만남에서도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거절당했었다. 하지만 거절당한 마음에 반응하는 방법에 있어서 남자는 자신만만했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파리로 향했었으므로 남자의 마음은 미리 예방주사를 맞았던 것이다.

도무지 응답이 없었던 여자의 단단한 마음 앞에서도 남자는 웃을 수 있었다. 여자가 발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아침을 먹고, 가끔 여자를 위한 점심 도시락을 만들고, 여자의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남자는 파리에서 되새기고 간직했던 마음이 있었다. 지금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찬란한 지금, 여자가 바로 자신 앞에 있다는 것.



남자가 바라고 원했던 나날들은 조금은 느리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여자의 옆에 쌓여가고 있었고, 쌓여가는 남자의 마음 앞에 언제부턴가 여자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파리였으니까.

그래, 남자와 여자가 있는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파리였으니까. 남자가 여자의 희미한 마음에 자신했던 것도, 단단했던 여자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갔던 것도 이상할 일을 아니었다.


어느 날은 여자가 먼저 남자를 찾는 일도 있었다. 남자는 그 날을 기적이라 부르며 없는 돈을 꺼내어 비싼 와인을 한 병을 샀다. 혼자 마시기엔 울어버릴 것 같아서 당장 마시진 못했다. 하지만 여자와 함께 이 와신을 마실 날이 그리 멀진 않을 거란 생각에 혼자 웃었다.

파리의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남자는 조금씩 더 행복해졌다.


남자의 예감대로 그리 오래지 않은 날에 여자는 와인잔을 들고 남자의 방에 왔다.

남자와 여자는 남자가 사두었던 비싼 와인을 함께 마셨고, 함께 누웠고, 함께 방을 썼다.

바라고 바랬던 마음이 덜컥 옆에 누워 있느니 남자는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느 날은 옆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여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 남자는 자신의 볼을 몰래 꼬집어보기도 했다. 남자가 꿈꿔왔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고, 그 꿈을 여자가 품은 채 남자의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아래 기적의 와인병은 고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행복했으며 아름다웠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마음의 끝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비정한 사실은 남자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이미 비워져 버린 빈 병의 와인처럼 다시 채워지지가 않았다. 비록 시작은 달랐다 하더라도 모양이 같아진 마음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던 남자의 희망은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파리의 전부였던 남자와, 파리의 작은 한편, 빈 공간을 남자에게 잠시 내어줬던 여자는 조금은 그렇나 확실히 품고 있는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마음을 키워왔던 거 남자였다. 어쩌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자는 동의를 얻지 못했던 그 마음을 보듬고 키우면 안 됐었다.

세상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두 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여자는 남자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자신과 다른 세상의 사람을 이해해보겠다는 것은 욕심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때론 한 없이 슬퍼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힘들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서히 확실하게 지쳐가는 것에 가까웠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노력할게. 널 사랑할 수 있어.”


자신의 사랑에 남자의 사랑을 조건으로 거는 것. 사랑에 노력을 들이댄 것. 사랑을 사랑 자체로 놓아두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첨가했다는 것. 이것들 만으로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는데, 그 충분함을 무시하고 여자를 사랑해 버린 남자는 눈이 멀어버린 짐승과도 같았다.

여자가 없는 빈 방의 거울 앞에서 남자는 몇 번이고 연습했다. 언젠가 한 번은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더 이상은 슬프지 않은 얼굴로 묻고 싶었으니까.


“왜 그렇게 사랑에 자신하는데?”


하지만 남자는 결국 묻지 못했다. 무서웠던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질문에 대답을 찾느라 사랑 자체를 고민해 버릴 것만 같았다. 고민에 잠길 때면 여자는 항상 말을 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걷기만 했었다. 걷고 걷다가 모든 게 빛을 꺼버린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조용히 돌아와 잠이 들었고, 아침이면 다시 조용히 나갔었다.

고민의 순간, 여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만으로 채워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 안의 남자의 공간은 자꾸만 좁아졌고, 남자는 그 안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여자 옆의 남자는 그저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었을 뿐. 그런 여자에게 사랑 자체를 묻는 건 어쩌면 잔인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남자가 여자에게 질문을 했더라면 여자의 대답은 남자에 향하는 사랑의 노력을 덜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한 공간에서 조금씩 외톨이가 되어갔다.



남자에게 여자는 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기에 손을 뻗어보지만 희망을 담은 손짓엔 매번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 여자 앞에 낙담했던 남자는 결국 파리에서 혼자가 되었다. 남자가 혼자 만들어낸 사랑의 환상은 견고해지기도 전에 허물어졌고, 무너지는 사랑의 환상을 바라보며 남자는 홀로 파리의 골목을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 보면 언젠가 여자가 이해되는 순간이 오겠지.

여자이지만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이기에 남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그녀의 사랑이 이해되는 순간이.

남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그 순간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시작되었던 사랑의 순간부터 남자는 종종 아니, 꽤 자주 여자의 사랑을 의심했었다. 여자의 사랑이 담긴 모든 말과 몸짓이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라 믿는 남자는 노력이 담긴 여자의 사랑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이 의심되면 사랑은 무너진다. 의심이 더 커다란 의심을 만들어내고, 덩치를 키운 의심은 사랑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파랗던 남자의 파리는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오늘 뭐했어?”

“그냥. 산책하고 책도 읽고 시장에 가서 장도 봤어. 너는?”

“나는 뭐 학교에서 수업 듣고, 극장에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왔어.”

“무슨 영화?”

“그냥. 좀 슬픈 영화.”


“아까 문자 했었는데. 시장에서. 뭐 필요한 거 있나 해서.”

“아, 그래? 핸드폰 보는 걸 깜빡했네. 미안해.”

“... 너는 날 사랑하니?”


영어가 서툰 여자와 불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남자는 다투는 것조차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어쩌면 어긋나 버린 마음을 이해시키지 못했던 건 언어의 문제는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을 다해 서로에게 쌓였던 것들을 풀어내고 덜어냈더라면. 그럴 수 있었다면 남자와 여자는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 좀 걷다 올게.”

“어디 가는데?”

“그냥. 어디든.”

여자는 외투만 바꿔 입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파리에서 남자가 자주 가는 곳은 "cafe de flore"였다.

강제적으로 섬나라에 살아왔으므로, 강제적으로 찬란했던 역사는 단절되었고 두 동강으로 나뉘었으므로, 그런 문화와 사고에 갇혀 살아온 남자에게 백 년이란 시간은 조금은 아득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엉겨서 만들어낸 것들이 일 년이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그 일 년이라는 시간들이 백번 쌓여야 만들어지는 시간. 그것은 남자에게는 현실적이지 못했고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설명 가능한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에게 문을 연지 백 년이 넘었다는 "cafe de flore"는 신비한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던 공기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면 시간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 됐다. 그곳에만 있으면 의심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심을 사랑으로 바꾸어 여자에게 속삭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가 점점 외로운 섬으로 변해갈수록 남자는 더욱더 자주 "cafe de flore"를 찾았다.



여자가 밖으로 나가고도 남자는 한참을 방에서 멍하니 있었다. 옅은 조명 아래 빈 와인병이 보였다. 빈 와인병을 다시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남자도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습관처럼 여자의 우산까지 챙겼다. 비록 사랑은 멀어지고 있더라도 여자가 혼자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걷는 것은 싫었다. 혹 걷다 마주친다면 함께 비를 맞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우산을 가방에 감추고는 남자도 비를 맞으며 걸었다.


속도가 다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처음부터 방향이 달랐음을 남자는 인정하기는 싫었다. 방향이 달랐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나가버린 시간을 모조리 끌어모아 서로를 다시 서로의 맨 앞으로 데려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는 여자의 손을 잡고 발을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야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를 기다릴 것이고 노력할 것이다. 고집했던 자신의 방향을 여자 쪽으로 돌려 보겠다. 조금은 늦어버린 남자의 마음이 비와 함께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외투가 무거워질 때쯤 남자는 "cafe de flore"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차에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사람이 만들어냈지만 사람보다 위대한 유일한 존재는 예술이라 믿었던 여자가 "cafe de flore"에 있는 건 당연했을지도. 이곳의 공기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 제랄드, 피카소의 숨을 담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카페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창가의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도 외롭겠구나 생각했다. 역시나 사랑을 노력한다는 것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슬픈 사실이 여자를 외롭게 만들어 버렸구나. 점점 멀어지고 지치는 사랑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서 외롭게 혼자 걷는 것 말고는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매번 다른 시간에 와 홀로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안식처는 "cafe de flore"였다.



방향이 달랐다고 해서 정말 사랑이 아니었을까?

여자의 사랑의 반 밖에 가질 수 없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했으므로 사랑이었다고 믿겠다고, 고개 숙인 여자를 바라보며 남자는 한참을 생각했다.

방향이 달랐고, 다른 방향에서 바보같이 서로의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국 이제는 아득히 멀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조차 사랑이었다고.



비에 젖은 외투를 입은 채 우산을 여자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남자는 카페를 나왔다.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자도 돌아서는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남자와 여자는 바랐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아프지 말자고. 더 이상 외롭지 말자고. 당신도 그리고 나도.

비가 그치고 나면 파리의 하늘은 분명 다시 맑아질 것이다. 언젠가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곳이겠지만, 파란 파리의 하늘을 다시 올려달 볼 날도 올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남자는 빈 와인병 옆에 새로 산 와인 한 병을 남겨두었다. 몇 번인가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메모는 결국 남기지 못했다. 이제 어떤 말이든, 어떤 마음이든 남자와 여자에겐 더해지지 않을 것이므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남자는 어쩌면 다시는 파리에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라는 건 다시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다.

어떤 모양의 사랑이든 다시 차오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잡히지 않았던 사랑 앞에서 앓았던 마음들도 괜찮아지겠지.

채우고 비워냈던 그 모든 순간이 그래도 여자와 함께이지 않았느냐, 그래서 얼마간은 행복하지 않았느냐, 남자는 생각했다.


비행기는 힘차게 파리의 하늘을 뚫고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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