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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an 12. 2019

나만의 원더랜드

이곳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멈춰 세운 것이 사람이 아니라 풍경이면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풍경 안에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있다면 속으로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공간에 대한 욕심이다. 나는 사람에겐 욕심내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공간에 대한 욕심이 컸다. 

가볍게 걸어 다섯 걸음. 좌 우로 그 정도의 공간에 큰 창만 하나 있으면 나는 배부른 사람이다. 덤으로 다시 한번 욕심을 내본다면 커다란 창에는 아침에만 해가 들었으면 한다. 아무래도 저녁은 저녁처럼 어두웠으면 좋겠다. 그 공간 안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 그것들만 있다면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걷지 않아도, 찾지 않아도 충분히 충분할 것이라는 희망. 

그런 풍경의 공간이 날 멈춰 세운다면,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영영 머물고 싶은 사람이다. 어쩌면 그곳을 찾아 계속해서 떠나고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잘 못 탔다. 

버스 번호를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바닷가 앞 하나뿐인 버스정류장에서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버스에 오르길래 당연히 숙소들이 몰려 있는 시내로 향하는 버스 이겠거니 생각해버린 것이다. 

버스에 오른 나는 많은 승객 중에 가장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은, 그러니까 과묵해 보이는 당신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시선은 창 밖으로. 귀에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꽂았다. James vincent mcmorrow의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와 안심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교차로를 세 개쯤 지나자 풍경은 낯설어졌고 내 손엔 땀이 나기 시작한다. 


길을 잃는 것도 여행이겠지만 향하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불안이다. 그리고 익숙함이 답답해 떠나왔지만 낯선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병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한 발치 떨어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병. 모순된 두 가지가 공존하는 마음속이 어지러웠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질 때, 그것들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비행기에 올랐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걸려있는 낯선 마음들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여행자야?”

불안한 눈빛으로 창 밖을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당신이 물었다. 과묵해 보였지만 당신은 과묵하지 않았다.

“응. 그런데 지금 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시드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당신은 과묵하지도 않을뿐더러 장난기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이 어딘데?”

당신의 대답이 내 불안을 덜어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뿌루퉁해져 급하게 되물었다.

“kirribilli.”

“kirribilli? 거기가 어디야? 시내랑 멀어? 나 지금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거든. 그런데 버스를 잘 못 탄 것 같아. 지금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면 시내로 갈 수 있어?”

불안이 재촉한 나의 말은 많아지고 빨라진다.

“No no. 일단 kirribilli에 가봐. 정말 멋진 곳이야. 나도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나랑 같이 내리면 돼.”

당신은 동행이 생겼다는 듯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웃을수록 나는 더욱더 심술이다.

“그런데 그곳이 왜 좋은데?”

숙소에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과묵하지도 않고 장난기 가득한 당신을 결국 동행으로 받아들였다.

“Don’t worry. 이유야 네가 찾으면 되지. 어쨌든 그곳은 나의 best place야.”

버스는 오페라 하우스를 등지고 바다를 건넌다. 당신은 계속해서 싱글벙글하고, 난 그런 당신이 못마땅하다.



풍경이 좋은 이유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풍경은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등을 보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내 등을 보여줘도 된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풍경 앞에서 나는 조금은 비겁해져도 된다. 

내 주위의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을 때 나는 선명해진다. 그래야 조금은 안심이 되었고, 그제야 잘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시야에서 사람이 걷혀야 잘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시내로 돌아갈 때는 길 건너편에서 녹색 버스를 타면 돼.”

당신은 버스에서 내려 친절하게 나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이제 날 따라와 봐. 내가 좋은 장소를 알려줄 테니까.”

나는 자신의 best place에 날 데려다 놓으려는 당신의 친절이 점점 더 부담스러워졌다. 내 시아에 자꾸 머물러 있는 당신이 거추장스러워 말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고마웠다. 



혼자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그런데 길을 잃은 나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건네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이 삶이란 생각이 하게 된다. 불안으로 걸어왔던 길에 정답이 없었으므로 이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방향이 틀렸다면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도, 처음부터 그 길을 함께 걸어가 주는 것도 사람이다.

등대처럼 나를 앞서 걷고 있는 당신의 넓은 등을 오래 본다. 핸드폰을 켜 지도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등만 보고 따라면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당신의 best place가 내 best place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당신의 넓은 등에 묻어 있었다. 발걸음에 힘을 주고는 앞서가는 당신과의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데려다 놓은 곳은 멀리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는 언덕의 끝 자락이었다. 시야가 멀리 뻗을 수 있었고 햇살마저 따듯한 곳이었다. 언덕의 조금 안쪽엔 창이 큰 벽돌집이 있었고 그곳은 정말이지 딱 내가 살고 싶은 집이었다. 시드니에서 드디어 나를 멈춰 세운 공간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자존심이자 오기가 생겼다. 이곳이 퍽 마음에 들었음에도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당신이 날 데려왔기에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당신은 왜 이곳이 좋아?”

좋은걸 티 내지 않으려 꾹꾹 눌러 담고는 덤덤한 척 내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아서.”

“움직이지 않아서?”

“응. 저기 저 멀리 높은 빌딩들 보이지? 저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야. 쉽게 말해서 굉장히 busy 한 곳이지. 저곳엔 멈춰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사람도. 자동차도. 하다 못해 길을 걷는 고양이들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여. 움직인 만큼 얻어낼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서 덩달아 나도 움직이게 돼버리지. 그런데 난 그런 busy 한 삶이 싫거든. 반대로 이곳에 와서 저길 바라보면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 필사적이었던 작은 움직임들은 멈추고 커다란 풍경만 남아. 그래서 무척 평화로워 보이지. 그럼 이런 생각을 하게 돼. 사실은 난 굉장히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이곳은 힘들고 혼란스럽고 전부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야. 그래서 이곳이 나의 best place야.”

당신은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너는 이곳이?”

“……”

그곳에서 풍경을 마음에 담느라 잠시 대답을 미뤘다.

“별로야?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거니까. 내가 이곳까지 데려온 거니까 커피 한 잔 살게. 멜버른만큼은 아니지만 시드니 커피도 꽤 괜찮거든. 저기 벽돌집 보이지? 1층이 카페야.”

나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먼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저기... 나도 이곳이 좋아. 당신의 말까지 들으니까 이곳에 살고 싶어 지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처음 나도 웃어 보았다.



유난한 사람이다.

유난하단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았다.

하지만 내 삶의 모양에 어떠했든, 어떤 색이었든, 걷다가 날 잡아둔 풍경들 앞에서 만큼은 나는 유난히 유난스럽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올 당신이 나를 데려다준 그 풍경 앞에서 조금은 유난스럽게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랬으므로, 커피값은 내가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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