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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an 19. 2019

길을 찾아주는 지도

마음의 계절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 라는 당신의 말에 나도 모르게 설레고 만다. 

그래서 쥐고 있던 몇 가지를 순간 놓쳐버린다. 그게 나란 사람이었다. 


계절 안에는 당신이 있었고, 당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과 같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마음이 내 것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물었던,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 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찾았던 건 결국 나의 계절이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하나라도 당신과 같은걸 나는 갖고 싶었다. 그때만큼은 사계절이 있다는 게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계절이 여름과 겨울 단 두 가지였다면 조금이라도 더 쉬웠을 텐데. 사지선다형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면. 양자택일의 문제에 있어선 난 꽤 운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 당신과 같은 계절을 함께 보내고 있었을지도.



당신의 계절로부터 튕겨져 나왔던 나는 지금 당신과 반대의 계절에 있다. 

길을 찾아주는 지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길을 잃어버린 계절 속에서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고 지내보기로 한다. 


며칠이 지났을까. 조금씩 말을 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진다. 

말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나눈다는 것일 텐데. 내가 먼저 마음의 문고리를 견고히 붙든 채 문을 닫아 버렸다. 

건너오는 눈빛을 피했고, 피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땐 손짓이나 약간의 추임새로만 말했다. 그러니까 온전히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입 밖에 꺼내지 않고서 낯선 나라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는 그 안에서 홀로 당신과는 반대의 계절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지내보니 알겠더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모질고 책임지지 못할 것들을 입 밖으로 뱉어내며 살아왔었는지를. 그 잘못들이 더욱 선명해졌던 건 아마 내가 머물고 있는 나라의 계절이 나의 나라의 것과 달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계절은 공기의 색을 바꾼다. 다른 계절 속의 사람들은 눈빛의 방향을 틀어버렸고 골목을 가득 메운 낯선 음식의 냄새들 마저 나에게 등을 돌리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우붓에서 난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선 하루 동안 마주치는 사람보다 마주치는 원숭이가 더 많았다. 말을 건네 오는 사람도 없었고 건넬 사람도 없었다. 비가 자주 내렸으므로 지붕이 필요했고, 비를 피해 지붕 아래서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어갔다. 책 속의 마음을 간질인 몇 문장에 밑줄을 긋고는 자기 전에 그것들을 다시 한번 들춰보면 정말이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 좋은 기분을 껴안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잠이 들었다. 그런 하루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충분해졌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날 아침. 빵과 커피로 요기를 하고는 물을 사러 숙소 앞 작은 가게에 가려는데 숙소 주인아저씨가 날 붙잡았다. 나에게 이곳에서 며칠을 더 머무를 건지 묻는다. 나는 비를 한가득 껴안고 있는 구름으로 덮인 이곳에서 그나마 해가 잘 드는 테라스가 있는 2층 방에 머물고 있었고, 1층에 머물고 있는 영국 여행자가 내가 나가면 내 방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고. 그렇게 묻는 것이 조금은 미안했는지 아저씨는 허허 웃으시며 영국 사람들은 정말이지 햇빛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이곳에 며칠째 머물고 있는지를 가늠했고, 며칠을 더 머물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서 결국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처음과 끝은 정해진 여행이었지만 아직은 돌아갈 날이 멀리 있었으니까.


“여행 온 거 아니야?”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아저씨는 의아한 듯 물었다.

“맞아요. 여행 온 거. 발리에 온지도 열흘은 지난 것 같네요.”

“열흘이나? 그동안 뭘 했는데?”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다시 한번 그동안 내가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생각했다. 그저 당신과 반대의 계절에 머물고 있다는 것 말고는 건져 올릴만한 것이라곤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라고 말하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저씨는 괜찮으면 자신의 자전거를 빌려줄 테니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지 않으니 좀 돌아다녀보라고. 중심가를 벗어나 보면 그래도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는 방은 신경 쓰지 말고 있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라고 했다.



결국 그날 나는 반강제로 건네받은 자전거를 타고 물을 사러 좀 멀리까지 다녀와야 했다.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은 그동안의 게으름을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강렬했다. 바람을 맞이하며 달리는 나는 어느덧 땀에 젖기 시작했다. 쌀을 경작하는 논을 몇 개쯤 지나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조금은 먼 곳의 작은 가게에서 물을 샀다. 물만 사 가지고 오면 충분했기에 자전거처럼 빠른 발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전거가 아저씨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모른척하기엔 그건 너무나 선명한 진심이었으니까. 


숙소로 돌아와서는 한참을 대문 앞에서 망설였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께 크게 꾸중을 듣고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나는 쭈뼛쭈뼛 숙소의 마당을 조심스레 살폈다. 마당에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조용히 자전거를 세우고 날름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자전거엔 바나나가 한 송이 들어있는 봉지를 걸어놓고는. 그리고 아저씨가 바나나 봉지를 들고는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마도 정작 당신은 내 마음이 궁금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지금 어느 계절에 있는지가 궁금해서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 물었을 것이다. 그걸 알지 못했던 나는 바보같이 반대로 당신의 마음을 되물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마음을 키우기엔 너무나 혹독했던 그 계절, 

그것들을 어깨에 이고는 힘겹게 당신을 뒤로하고 돌아섰던 그 계절, 

결국 난 당신을 겨울에 남겨두고 여름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제는 괜찮다 괜찮다, 혼잣말을 백 번쯤, 열 마디에 나누어 뱉어내고 나서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는데.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그런데 오늘 숙소 주인아저씨가 자전거에 담아 건넨 마음처럼 불쑥 진심이 건너오면 나는 다시 속수무책이 된다. 

당신과 반대의 계절은 점점 옅어지고, 당신의 모든 게 다시 선명해진다. 결국 어느 곳에서든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떠나와 찾아낸 이 따듯한 계절에서도 난 머물지 못하게 돼버렸다.



당신에게 향했던 마음을 껴안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듯했던 계절이 었었다. 

그 계절이 삶의 방향이 되기도 했으니 계절은 나에겐 지도였다.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랬었던 모든 것이 더 이상 괜찮다 말해주지 않는다. 이제는 괜찮지 않은 그것들 사이에서 난 계절이라는 지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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