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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Dec 29. 2018

우리는 모두 행복한 여행자

한 끗 차이로 행복할 수 있잖아

옷에 향기가 밴다. 

비좁은 선술집에서 뿌연 연기와 함께 엉겨 붙은 고기 굽는 냄새와 당신의 눅눅한 숨에서 뱉어져 나온 비릿한 술냄새. 그곳에 오밀조밀 모여있던 사람들의 냄새. 당신에게 향하는 길, 설렘으로 기다리기 힘들었던 건널목 신호등에서 밴 도시의 냄새. 그리고 내게 밴 모든 냄새를 덮어버렸던 당신의 향기까지.



당신의 향이 밴 옷을 며칠 이곤 집에 걸어두고는 그냥 바라본 적이 있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 충분했는지 당신의 향 덕분에 하루를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보내기도 했었고,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당신의 향이 날아갈까 창문을 꼭 닫아두었던 날도 있었다.

반대로 견디기 힘든 냄새가 밴 옷들은 해가 쨍쨍한 날을 기다렸다 힘껏 털어내곤 했다.

단단하게 붙들려 있는 건 낯선 냄새였음에도 내겐 기분이었고 시간이었고 공간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향기 하나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시간을 소비하고, 싫은 걸 견뎌내고, 좋아하는 것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에어컨이 고장 났는지 버스의 에어컨에서는 계속 더운 바람이 나왔다. 낑낑대며 힘겹게 창문을 열어봤지만 이미 정원을 초과한 사람에, 거기에 닭 두 마리에, 버스정류장에서 보고는 설마 했던 염소 한 마리까지 더해진 버스 안은 도무지 시원해지지가 않았다. 

이러다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지쳐 쓰려지겠구나 생각했다. 게다가 버스 안에 모든 것이 뒤섞인 도무지 알 수 없는 냄새가 자꾸만 나에게 엉겨 붙어 온 몸에 배기 시작했으니, 숨 쉬는 것도 힘들어졌다. 


바람 한 가닥이라도 건져보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창 너머 저 멀리서 언제 부서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덜덜 거리며 버스 옆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낡은 오토바이는 혼자도 충분히 힘겨울 텐데 건장한 청년 네 명을 싣고 달렸다. 오토바이에 네 명이 올라탄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 오토바이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덜덜덜.

바람을 타고 건너온 오토바이의 소리가 꼭 그것의 마지막 숨소리 같았다.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는 것 같아 가엽기도 했다. 역시나 그렇게 잠시 버스와 나란히 달리던 오토바이는 어마 지나지 않아 결국 덜덜덜 푸시식, 마지막 숨소리인지 절규인지를 내뱉고는 도로 위에 퍼져버렸다.

일 년 내내 더운 라오스에서, 오늘처럼 뜨거운 날 퍼져버리다니. 

쯧쯧. 오토바이도 오토바이었지만 이 무더운 날씨에 뜨거운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청년들이 가여워 잠시 오토바이와 네 명의 청년을 위로했다. 



뜨거운 도로 위에 퍼져버린 오토바이에 시선을 거두고는 내 옆 자리에서 보자기에 싸인 채 고개만 내밀고 눈을 껌뻑거리던 닭과 눈이 마주쳤다.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길 위에서 퍼져버린 오토바이나 닭과 함께 답답한 버스 안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나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다시 나의 더위에 집중. 바람 조차 더운 이 버스 안에서 나는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있었으니까.

버스가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자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냉큼 콜라 한 캔을 주문했다. 그런데 젠장. 콜라조차 미지근하다.

주인은 냉장고에 있던 콜라가 아니라 진열대에 놓여있던 콜라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콜라의 빨강 모습에 당연히 시원하겠거나 생각해 버린 내 잘못이었다. 콜라조차 시원하지 않아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냥 돈을 좀 더 주고서라도 여행자 전용 버스를 탈 걸 그랬다 싶었다. 한국돈으로 치면 로컬 버스와 고작 몇 천 원 남짓 차이뿐이었는데. 그걸 아껴 보겠다고 길 위에서 시간과 체력과 기분을 낭비하고 있다니.

요동치는 감정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미지근한 콜라를 계속해서 들이켰다. 땀은 목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아까 그 고장 난 오토바이와 네 명의 청년들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두 명의 청년은 오토바위 위에 올라타 있고, 두 명의 청년은 온 힘을 다해 오토바이를 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달리더니 서로  역할을 교대하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더 더워 죽을 것 같은 상황. 그런데 뭐가 재미있는지 오토바이 위의 청년 들도, 오토바이를 밀고 있는 청년들도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미는 것보다 웃는 것에 더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여전히 무더웠고, 햇빛은 따가웠고, 비 오듯 흐르는 땀에 웃옷은 이미 흠뻑 젖었지만 이상하게도 청년들은 행복해 보였다. 미지근한 콜라를 마시며 투덜대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뜨겁다 못해 아프게 내리쬐고 있는 태양조차 청년들을 비켜가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일까. 청년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지금 서 있는 장소의 문제 일까. 아니면 소유가 만들어낸 물질의 견고함을 비껴 살고 있는 삶의 여유일까. 청년들의 웃음이 내가 생각했던 행복의 기준에 도무지 맞아들 지가 않아서 한참이나 바라봤다. 

마음에 진실되게 반응하며 살아온 삶의 분량이라던지, 아니면 내가 향하며 걸었던 어떤 한 사람의 뒷모습이라던지,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지워지지 않는,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었던 당신의 향기라던지.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있다면 행복을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것일 수도.  

그런 행복들에는 더운 바람도, 흘러내리는 땀도, 미지근한 콜라도 그 행복에 간섭할 수 없다.

생각의 한 끗 차이로 행복이 잡힐 것 같다는,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지금 땀을 흘리며 미지근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버스를 타고 앞으로 4시간을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나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 까지.


청년들의 깔깔거리던 웃음소리가 몇 가닥의 향기를 타고 와 내게 말했다.


“것 봐. 한 끗 차이로 행복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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