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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Dec 15. 2018

당신이라는 희망

여행의 하루쯤 포기해도

여행지에서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아무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제가 너무 닳아서일까요, 아니면 더 이상 이곳에서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저는 와서는 안 될 장소에 머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이렇게 엉망이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초보 대장장이처럼 뜨거운 불 앞에서 멀뚱 거릴 뿐입니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해 버리는 건 조금 비겁할까요?

아니 희망조차 희미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돌아서 포기해버려야 할까요?

지금의 조금 얼얼한 내 마음을 설명할 길이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애쓰지 않으려 합니다. 힘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 버리는 거죠.

지금의 제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두 눈을 딱 감고는 크게 한 숨 들이쉰 뒤,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원래 그런 거야, 라고요. 그러면 당신이라는 희망이 다시금 조금 선명해지곤 합니다. 



문득 익숙해져 버린 여행지에서의 하루를 오늘처럼 그냥 흘려보내 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로 나의 여행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비어버린 내 하루에 당신을 살며시 그려 넣고는, 그 옆에 살짝 날 얹어보면서 함께 웃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당신과 나라는, 조금은 이질적인 두 개의 그림은 하나가 되고, 그 그림 안의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커다랗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여 생각하고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합니다. 비록 그 커다랗던 일 때문에 먼 곳으로 떠나왔지만요.



이렇게 찾아오는 여행의 게으른 하루는 늦잠과 따듯한 햇살, 그리고 소박한 공간에 머무르면 조금은 빈약하더라도 천천히 차올라 충분해집니다. 그렇게 하루쯤 비워내고 다시 내일부터 채워나가면 그만이죠.


가끔 누군가 묻습니다. 

떠나고 돌아오는 것에도 끝이 있느냐고. 왜 머물지 못하고 계속 어디론가 가려하느냐고 말입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이상하게도 항상 있는 곳의 반대편이 그립다고. 정작 가보면 그리웠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헛된 시간을 쌓아두기만 하지만. 그래서 결국 다시 떠나는 거라고.

무언가에 열중한 나머지 그나마 나에게 남겨져있던 몇 개를 놓쳐버리고, 종국엔 열중한 무엇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뛰어야만 했던 것이 제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은 느린 방법을 택합니다. 

카페의 옅은 조명 아래서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소박한 공간에서 당신이 없어 잠겨있던 나를 가만히 건져 올립니다. 할 줄 아는 것이 희망하는 것 빼곤 없는 오늘, 당신에 대한 몇 가닥의 희망을 붙잡고는 그것으로 그럭저럭 지내봅니다. 


이것이 내가 낯선 곳에서 내 몫에 넘치게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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