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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Dec 08. 2018

사랑에도 소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훔쳐봤던 마음

사람으로부터 불어왔던 바람은 따듯했다. 

언어가 담겨있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던 바람은 먼 곳에서는 든든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는 그 바람을 맞으러 이렇게 떠나고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훈풍에 내 마음을 조금 데우고 나면 조금은 더 오랫동안, 한 발자국만큼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진 않을까. 그리고 그만큼을 떠났다가 다시 그만큼을 당신에게로 되돌아 갈 수 있진 않을까.


마음을 할퀴었던 찬 바람 때문에 시작되었던 여행이 먼 곳에서 따듯한 바람 때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그러니까 나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일종의 마음으로 불어온 바람의 결자해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당연한데, 그것 때문에 아프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돌린 것이다. 습관이다. 향하고, 바라고, 다가오는 것들에게서 뒤돌아 등을 보이고 마는 것. 간격을 벌리고 마을을 떨쳐내는 것.

두려움 이라기 보단 차라리 불안이라 하겠다. 당연했던 것들에서 혼자만 비켜있다는 것은 분명 불안이다. 불안이 불안해지면 떠났고, 그곳에서도 불안해 돌아왔다. 

생각해 본다. 이 모든 것이 핑계는 아닌지. 떠나기 위해 일부러 발치 앞의 삶에 고개를 돌리고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침을 먹을 요량으로 숙소 앞 카페에 갔다. 

이 카페가 좋은 점은 나처럼 혼자 오는 손님이 많다는 것과, 무엇보다 커피와 크로와상이 맛있다는 것이다. 

특히 크로와상은 그 맛으로만 따지면야 그것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파리의 크로와상 못지않았다. 

에그타르트가 유명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에그타르트가 아니라 크로와상이 맛있는 집을 발견한 것이 스스로 대견했다. 이곳에서 에스프레소와 갓 구워낸 따듯한 크로와상을 먹으면 그날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다. 배를 채우기보다는 마음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곳에 난 조금은 아늑해졌고, 그래서 넓어졌고, 그래서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크로와상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카페 안 한 남자를 훔쳐본다. 

무언가에 설렌 건지 아니면 불안한 건지 안절부절못하던 남자의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어제도 이 시간에 봤던 남자다. 조금 특별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내가 훔쳐보고 있는 남자는 창가에 앉은 여자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 

남자는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머리와 말끔한 옷차림이었고, 남자가 훔쳐보고 있는 여자는 이제 막 일어난 것처럼 긴 머리는 고무줄로 헐렁하게 묶었고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뻔한 상황. 남자의 마음이 여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사랑의 태동이었다.


남자가 훔쳐보고 있는 여자의 테이블 위 커피는 그녀에게 충실했지만, 남자 테이블 위의 커피는 맹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면 쓰디쓴 쌍화탕일지도. 맛을 내기 위한 무언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한, 수줍고 설레는 남자를 가려주기 위한 하나의 사물에 가까웠을 테지.



여자가 머리를 넘기며 옆으로 고개를 돌라지 남자는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손은 마시지도 않을 커피잔을 불안하게 만지작 거리면서. 남자의 심장박동수는 방금 최고점을 찍었을 것이다. 귀까지 발개지는 걸 보니 가여워 다가가 괜찮냐고 어깨라도 토닥거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난 살며시 웃었다. 

남자가 품고 있는 작은 사랑의 마음이 카페 안의 공기를 따듯하게 데우고 있었다. 여자 덕분에 이 카페는 매일 아침 빠지지 않고 카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 한 명을 더 얻었을 것이고, 남자는 여자보다 항상 일찍 와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남자를 모른 채 하고 있는 저 여자도 사실은 남자를 관찰하고 있는지도. 

자신에게 향하는 남자의 사랑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과연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 남자가 날 보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카페를 올 수 있는지를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할 만한 남자인지, 남자에게 건너온 감정을 기꺼이 받고, 자신의 마음속 감정을 건네도 되는지를 말이다.



사랑의 태동이 서로에게 동일하게 겹친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건네는 모든 것에 마음을 담았다 하더라도, 그 모두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이라는 것이 바란다고 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쉽게 단념해 버리기엔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 그러니 그 마음을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카페를 찾는 매일매일이 행복할 테고, 남자의 마음은 그것이 향하고 있는 여자의 주변을 따듯하게 데울 것이다.



마음에 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사랑의 마음에 있어선 그랬으면 좋겠다. 

눈에 빤히 보이게 티가 나고,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게 선명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의 모든 순간들이 눈에 부시도록 아름다웠으면. 지금 이 카페의 공기처럼 말이다. 

남자의 마음으로 따듯하게 데워진 공기가 내일이면 남자와 여자가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시는 기적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슬며시 크로와상 두 조각을 주문해 그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텐데 말이다.



리스본에서 매일 나의 아침을 채워주는 커피와 크로와상, 그리고 살짝 훔쳐봤던 남자의 마음. 그 마음이 향했던 방향까지. 

나를 채워줬는 그것들로 충분히 좋았던 기억들이다.

훔쳐봤던 삶도 삶이라면, 난 여러 번 살았다. 덤으로 살았으니 지나왔던 그 모든 풍경들에 감사한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따듯한 삶을 몰래 훔쳐볼 수 있다면,  내 삶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의 마음에도 소리가 생기고 움직임이 생겨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끝이 나야 만 했던 몇 날들일 이제는 떨쳐낸다.

불안으로 억지로 움켜쥐고 있었던 늦은 후회들도 이제는 놓아준다.

저는 이런 사람이라서,라고 시작했던 모든 말들을 이제는 가둬둔다.


그날엔 당신에게 오늘 내가 본 따듯한 풍경을 이야기해줘야겠다. 

조금은 더 따듯하고 조금만 더 느리게. 

그렇게 지금 이곳처럼 우리의 공기를 데우고, 따듯한 커피와 맛있는 크로와상을 함께 먹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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