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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Dec 01. 2018

에펠탑 아래에서

당신에게는 상처가 되겠지만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이다. 

꽤 단단한 길이라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괜찮을 것이라 속삭인 뒤 날 끌어 들여놓고선 그 뒤부턴 나 몰라라 했다. 

세상이 그랬고, 여행이 그랬고, 어쩌면 당신이 그랬다.


컴퓨터의 리셋 버튼 같은 것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 버튼만 누른다면 혼란스러운 모든 것이 순간 다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매일 저녁, 잠이 들기 전 그 버튼을 누르고는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은 새로운 마음이 장착되는 것. 어느 날엔가 정말 리셋 버튼을 누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새벽의 어느 순간 그것 때문에 잠깐 행복하기도 했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에펠탑엘 갔다. 

이미 질리도록 봤었던 에펠탑이지만, 숙소의 창문만 열어도 보이는 에펠탑이었지만, 모두가 모여드는 곳이니 무엇인가 그곳에 있겠구나 싶었다. 아직 내가 찾지 못했을 뿐.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 떠나온 이유인지,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에펠탑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째 에펠탑에 출석체크 중이다. 이곳 파리에서.


 

창 밖으로 에펠탑이 보이는 숙소의 거실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옆 자리의 남자가 여기서 에펠탑을 어떻게 가느냐 물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라 나는 잠시 당황했다. 눈짓으로 창 밖 너머 선명하게 보이는 에펠탑을 가리켰다. 내 시선을 따라 함께 시선을 옮긴 남자는 그제야 "아, 에펠탑이 바로 보이네요."라고 말한다.

"가까워 보이긴 하는데 걸어가기엔 꽤 멀어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더 편합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녁에 가는 게 좀 더 예뻐요. 낮에는 너무 밝아서 에펠탑 말고도 다른 게 잘 보이거든요. 전 별로더라고요. 에펠탑만 잘 보이는 저녁이 더 좋습니다." 

나는 내친김에 좀 더 친절을 베풀었다. 남자는 아마 파리가 처음이었을 테고, 그의 파리엔 에펠탑이 가득할 테니 이 정도의 친절은 에펠탑에 대한 예의라고 해두자.



때론 장소가 닫힌 입을 열게 한다.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데우고 녹여서는 조금씩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땐 진심이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 그것의 색깔이 적의를 띤 빨강일지라도, 크기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덩치를 키웠을지라도, 진심이므로 괜찮아지는 장소. 아마 나에게도 남자에게도 그 장소는 에펠탑이었나 보다. 


남자는 오늘 저녁에 에펠탑을 갈 거냐 물었고,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함께 가자고 했다. 

아침에 처음 만난 남자가 살갑게 건넨 제안에 난 그만 자연스레 수긍하고 말았다. 어떤 자연스러운 기운이 있었다. 게다가 함께 가자고 한 곳이 에펠탑이었으니까. 거절은 무례했을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 아래서 감히 와인이 아닌 맥주를 마시며 눈시울이 붉어졌던 남자.

왜 이곳에 온 거냐고요? 보내지 못한 사랑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억하려고요. 이제는 정말 “다시”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 할 만큼 끝까지, 그 끝의 마지막까지 모조리 다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제 기억의 용량을 완전히 소모해 버리는 거죠.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완전히 다 써버리고 돌아갈 겁니다. 한국에서는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아직 마음속에서 차마 보내지 못한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요. 옆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야 겨우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 사람을 꺼내놓는 거예요. 맨 정신으론 도저히 힘드니까 이렇게 술도 한 잔 하면서 말이죠. 그 사람 에펠탑을 무척 좋아했었거든요. 이게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에펠탑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나도 남자도 서로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반짝이는 에펠탑 앞에 서서야 겨우 꺼낸 여행을 왜 하느냐, 라는 나의 질문에 남자는 거침없이 대답을 쏟아냈다.



세상의 여행이 백개라면 여행의 이유들도 백개나 되겠지만, 온전히 이해가 되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남자의 여행의 이유. 

“우리”라는 이름을 조금씩 허물어지게 만드는 남자의 여행을 나는 위로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한국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를 위해서 정신 차리라고 남자의 등짝을 한 대 때려줘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의 이유는 결국 에펠탑 아래서 와인이 아닌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에펠탑에 대한 남자의 건방짐 때문이라고 덮어버리고는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살라고 했다.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막고, 보이는 모습에도 눈을 감으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고 누군가에게 그 사람을 묻지도 말라고. 당신의 안부를 드러내지 말고, 노력으로 알은 채 하지 않다 보면 결국 마음에서도 지워질 거라고. 

그리고 이제는 지금의 사랑을 좀 더 사랑하라고.



떠나온 사람은 온전히 관계의 공백의 책임을 져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각오했다 하더라도 어떤 말로 떠남의 시작을 전달해야 하는지 우리는 매번 난감하다. 

돌아서는 비겁한 마음을 포장하려 해서도 안 될 것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떠나는 것을 망설여서도 안 될 것이다.

이별 앞에서 표정에 미안함을 담아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조금은 뻔뻔스럽게 당당함을 드러내야 할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전해야 할는지, 기다리지 말라는 잔인한 선언을 던져야 맞는 것인지. 그래도 당신이라는 먼 곳에서 흔들릴 때 바라볼 수 있는 등대 하나쯤 있어서 좋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전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당신 없이 혼자였으면 좋았겠다, 라는 잔인한 바람을 품어야 할는지. 


어쩌면 지금 내 앞의 남자처럼 한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간절한 협박을 눈빛에 담아 건네고 떠나와서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불안의 곱절을 껴안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두 남자의 혼란스러움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는 에펠탑은 오늘도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사랑의 끝과 시작에서 어느 쪽으로도 발을 딛지 못하는 남자와,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의 이유도 찾지 못했던 나는 길을 잃은 미아 같았다. 

여행과 사랑의 이유가 같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정답도 같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정답은 낮의 태양과 밤의 달처럼 영영 만나지 못한 슬픈 운명의 쳇바퀴 위에서 서로의 꼬리만 바라보며 도착할 수 없는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언젠가 당신께 보냈던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하루 한 번은 꼭 우체통을 확인했던 그 마음. 고작 그것 하나 때문에 하루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야만 했던 서글펐던 날들. 답장을 보내지 않는 당신의 마음을 혼자서 외롭게 변론했던 고독했던 저녁들. 그리고 그 마음들과 시간들이 내 여행의 이유가 되어버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러니 나는 이제 오지 않을 당신의 답장에 다시 답장을 써보려 한다.

그 답장엔 나는 차라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다 말하겠다. 그러므로 떠나온 것이라고. 

그것이 비겁한 속임이자 슬픈 회피일지라도. 내가 에펠탑 아래에서 찾아낸 정답이 행여 당신에게 상처가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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