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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Nov 17. 2018

길 위에서 만난 스무 살

시간의 곱절을 껴안고 산다는 것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순리에 가깝다. 

나이는 우리의 앞 뒤로 지나치는 시간이 겹쳐 만들어놓은 하나에 작품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소한 일상들이 엮이고 엮여 나이라는 단단한 그물을 만들어내고는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일 수도.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숨이 막히기도 한다. 그것을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조여 오니까. 

그런 면에서 나이는 사랑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그것에 쩔쩔매고, 숨이 막히고, 종국엔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겐 없다.

하지만 사랑도 나이도 그리 비정하지만은 않다. 끝나버린 사랑은 다음 사랑을 가져다줄 테고, 나이는 우리 안에 시간을 쌓아가지만 반대로 그만큼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래서 나이에 걸맞게 사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레 저절로 이루어진다. 

나이도, 사랑도 성실하게 우리의 옆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어엔 스무 살을 부르는 특별한 말이 있다. 

그들은 스무 살을 스무 살이라 부르지 않고 "はたち(하타츠)"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만큼 스무 살이 특별하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나이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스무 살은 그 향기가 진해서 그 시작과 끝이 선명하고, 어쩌면 삶이 그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일 수도.

그것의 너무나 대단하고 감격스러워 그것에만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마음. 나는 그 마음이 너무 이해가 돼서 언젠가 이 말을 알려준 일본 친구 앞에서 몇 번이고 이 발을을 되풀이했었다. 

하타츠, 하타츠,라고.



스물. 

나는 조용히 읊조려본다.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싱그럽다. 

스물이라는 단어를 입에 머금을 때 나는 종종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듯한 기분이 되곤 한다. 

‘스’를 발음할 때 입에서 세어 나오는 푸른 바람 소리는 ‘믈’을 발음할 때 닫히는 입술을 비집고는 세상으로 튀어나온다. 설렘을 가득 안고 세상을 향해 돌진한다. 

스무 살은 바로 그런 나이인 것이다. 틈을 비집고 나와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나이.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것 스스로 발산하는 빛을 감출 수 없다. 스무 살은.



세상의 스무 살에겐 모든 것이 용인되기도 한다. 

무모한 도전도 스무 살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처참한 실패도 스무 살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회를 얻는다. 사랑의 열병도 스무 살이기 때문에 그래도 아름다울 수 있고, 이별의 무너짐도 스무 살이기 때문에 다음 사랑의 연습이 될 수 있다. 

세상이 수많은 혼란스러움을 끄집어 모아 모든 가능성이 닫아버린 상황에서조차 스무 살은 ‘특별히 너는 괜찮다’라는 만능 티켓을 손에 쥐는 나이다. 하지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은 정작 스무 살 당시의 그 어떤 청춘도 쉽사리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모든 시기와 질투로 스무 살의 청춘을 속이려 한다는 것.



조금은 헐렁하게 돌아다니고, 무엇을 채우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방 문을 열였을 때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청춘을 반겨준다. 나의 스무 살을 돌아보아도 그랬던 것 같다. 청춘이라는 것, 그것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했던 모든 것에 실패했더라도 스무 살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쿠바에서 만난 H는 그런 스무 살 다운 스무 살이었다. 

전날, 늦은 오후에 바라코아에서 출발해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나서 다음 날 아침에야 나는 트리니다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는 강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추위에 떨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니, 이 더운 나라에서 추위에 떨게 될 줄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제는 긴 이동이었다. 몸이 지쳐있었다. 

내 몸뚱이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어렵게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는 숙소 주인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도 못했다. 

숙소 주인은 더위는 맞서지 말고 피해야 한다며 시원한 주스를 한 잔 내주었다.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켜고 나서야 나는 조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때 H를 만났다. 

H는 막 하바나로 떠나던 차라 우리의 만남은 순식간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이곳은 쿠바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정말이지 몹시 지쳐있었고, 차라리 천장에 붙어 희미하게 돌아가고 있던 팬에서 뻗어 나오는 미지근한 바람이 그녀보다 반가웠다. 

그런 나에게 H는 안녕하세요,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라는 두 마디의 말을 쏜살같이 남기고는 택시에 올라 떠나버렸다. 결국 나는 입을 떼 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한순간에 맞이하게 된 것이다. H가 떠난 뒤 그녀의 꽁무니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뭔가에 홀린 듯도 했다. 그리고 약간의 풋풋함의 여운을 느꼈다.

며칠 뒤 나는 하바나로 이동을 했고 그곳에서 다시 H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그제야 난 그녀가 나에게 남기고 간 풋풋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건 스무 살이 흘리고 간 푸른 에너지였다. 그녀는 스물이라는 자신의 나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에 솔직한 진심으로 반응했고, 항상 상황보다는 품고 있는 마음에 우선을 두었다. 

H는 여행지에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의 울렁임 들을 맑게 들여다보고는 하나하나에 열심히 대답했다. 그러니 그녀가 밥을 먹는 것도, 의자에 앉아 쉬는 것도, 햇볕이 뜨겁다며 밖에 나간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숙소로 돌아와 버린 것까지, 나는 그녀의 모든 게 다 부러웠다. 그녀의 에너지가 탐이 났다. 


그녀의 옆에 있자니 나도 덩달아 스무 살로 돌아간 듯 한 기분이었다. 그녀에게서 넘쳐흐르는 푸른 에너지 몇 개를 몰래 주어 내 주머니에 넣어두고선 몰래 혼자 꺼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바나에서 며칠을 지내며 나는 H를 본의 아니게 염탐했었고, 그럴 때마다 내 기억 속 다른 한 명의 스무 살을 떠올랐다.



아이는 내가 처음으로 가르친 학생이었다. 

삶이 던지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밥을 거르듯 학교를 거르던 아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의 그림자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건네는 관심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만 치고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어느덧 그 아이도 이제 스무 살이 되었다. 간간히 연락의 끈은 놓지 않았기에 나는 지난봄, 스무 살 성인이 된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했었고, 아이도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므로 조금은 삶이 가벼워졌길 바랐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이는 처음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가지지 못했었다. 너무나 푸른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아이에게만은 비정했다. 성인이 되었으므로 감당해야 할 책임만 늘어났을 뿐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건 예전에도 지금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이제는 건네는 마음을 조금은 받아들인다는 것뿐.



스무 살. 

같은 나이의 아이와 H의 삶의 결이 왜 이리도 달라야만 했던 걸까? 

스물이라는 나이는 너무나 눈부시기만 한데 왜 아이는 그 눈부심의 반대편에 서있어야만 했던 걸까. 

난 H를 볼 때마다 아이가 생각났고, 그때마다 아이가 서글퍼졌다. 나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 쌓여 만들어진 주름이라면 아이는 이마에는 그것보다 훨씬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감당해야 할 것보다 그 곱절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스물의 싱그러움도 아이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잔인하게 등 뒤에서 날카롭게 아이를 겨냥했다. 자신의 것을 세상에 뺏겨버린 채,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 체념의 옷을 입고는 스무 살의 어떤 것도 누리지 못하는 아이. 네 잘못이 아니니 짜증도 내보고 원망도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결국 아이의 반대편, 청춘의 언저리에서 그래도 꾸역꾸역 잘 살아냈던 내가 부끄러워 서였을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이가 입고 있는 스물이라는 나이가 그래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는, 언제 간 사라질 현기증 같은 것이길 바란다. 

스무 살의 아이가 자신만의 아스피린을 한 움큼 집어먹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으로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에서 자신을 좀 더 누릴 있는 자신만의 스물을 만날 수 있길. 

스물의 싱그러움이 아이를 비켜가지 말길. 

그리고 바라는 것을 바라며 살 수 있기를 말이다.


그 언젠가는 자신만의 청춘에서 푸르게 빛나는 아이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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