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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Nov 10. 2018

사랑이 사랑인데도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닿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도 아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해도 아플 수 있다.

사랑이 사랑인데도 우리는 아플 수 있다.



우리의 입에서 빠져나온 사랑한다는 말이 허공에서 힘 없이 흩어져 버릴 때, 우린 작은 방 안에서 자주 아팠습니다. 사랑한단 말이 자꾸만 아파서 그만 입을 닫아 버렸는데 덩달아 마음도 닫히고 말았으니, 어쩌면 우리는 이별 앞으로 성실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지도요. 우리의 그것은 겨울 나뭇가지의 끝자락에 걸린 마지막 눈 한송이처럼 춥고 위태로웠습니다. 기댈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것.

멀어지는 마음을 담아두기엔 우리의 방은 너무 좁았고, 너무 조용했고, 너무 아팠습니다. 

아프겠지만 그렇게 한 번 죽을 만큼 아프고 나면, 그다음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다음은 조금은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요. 

외로웠던 눈 한송이가 그렇게 녹고 나면 봄도 오고 그 자리에 새싹도 돋아날 거란 뻔한 시간의 섭리에 기댈 수 있진 않을까요.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당신은 몰랐겠지만, 당신이 없는 방 안의 고요함을 나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매일 아침 마당에 나가 이불을 털고, 바닥을 쓸고, 깨끗하게 설거지까지 했습니다. 방 안의 내 흔적을 모조리 지워낸 뒤 가방을 챙겨보았습니다. 다시는 이 집에, 사랑한단 말이 아프게 메아리쳤던 이 작은 방에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하며 여권도 챙깁니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의 일렁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울리지 못했을 때,

서둘렀던 마음이 서툴러 당신이 내 마음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 안의 내 흔적을 지우는 일과, 짐을 챙겨 방을 나오는 것, 그리고 무력하게 결국 당신보다 더 늦게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습니다.



파리 13구역. 

오늘도 습관처럼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나는 파리 지하절의 정기권을 가지고 있으니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르더라도 일단 지하철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꾸준하게 향하고 있는 지하철, 그 안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나를 잠시 숨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하철의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개찰구를 통과해 매일 같은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립니다. 음료를 파는 자판기 옆, 나란히 놓인 네 개의 의자 중 자판기에서 가장 먼 의자.



맞은편 승강장엔 금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가 서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어제도, 그제도 이 시간에 봤던 여자입니다. 매일 이 시간이면 그녀는 어김없이 나의 맞은편에서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릅니다. 시선은 불안해 보였고 자꾸만 주머니 속 담배 갑을 만지작 거립니다. 그녀 주변의 공기가 조금은 더디고 무겁게 움직입니다. 아마 마음속에 허공으로 흩날리고 싶은 무거운 게 몇 개 있을지도요. 

그녀의 사랑도 내 사랑처럼 아픈 걸까요? 

그녀의 어떤 부분들도 나처럼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만 쌓여 가고 있었을까요. 그렇게 쌓여버린 것이 무거워 가슴도 마음도 답답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자꾸 어디로만 가려하는 걸까요.



잠시 담배를 피우는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오른손으로 담배를 피울까요? 아니, 프랑스엔 유독 왼손잡이가 많으니 여자는 왼손으로 담배를 피울지도 모릅니다. 얇은 담배를 빨아들일 때 미간을 약간 찌푸릴지도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라도 충분히 예쁜 얼굴입니다. 연기를 내뿜을 때 파란 눈동자를 눈꺼풀이 살짝 덮을 것이고, 마음속 무거운 것들은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날려버리려 하겠지요. 그렇게 될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자의 남자는 여자와 키스를 한 뒤 여자에게 여리게 남아있는 담배 향기에  한 번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에 잠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녀가 왜 아픈지 고민하겠지요. 사랑은 사랑인데도 말입니다.

사랑을 해도 아픈 거라고, 아플 수 있다고 나는 여자의 남자에게 나지막이 말해 봅니다.



여자를 바라보다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다음번 지하철에 올라탔습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는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도 두꺼운 책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오늘 중요한 시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는 남자의 눈빛에 목적이 있는 것 같아 그것 조차 부러워집니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내린 나는 개찰구를 빠져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잠시 망설입니다. 어딘지 모른 그곳엔 네 곳의 출구가 있었고, 난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실이 자꾸만 나를 더 아프게 합니다.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습니다.


그때 푸른 불빛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푸른빛 속에 반짝이던 하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화살표 위의 작은 숫자가 얼마만큼을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작 그 작은 화살표 하나에 덜컥 눈에 물이 차오릅니다.

알려준 그곳으로 만 간다면, 그곳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그곳에 머물러 다시는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나는 마음속에 표지판을 담으려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습니다.



우리는 외로웠을까요. 서로가 서로의 옆이었는데도 그토록 잔인하게 외로웠을까요.

묻지도 못할 만큼, 스스로 입 밖에 외롭단 말을 꺼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아팠을까요.

방문 앞에서 방안의 당신의 기척만으로도 문을 열기를 망설였던, 그래서 당신의 잠들기를 기다리며 쓸쓸하게 걸었던 그 밤 산책이 어쩌면 가장 큰 위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당신에게 닿진 않겠지만 나는 몇 번이고 묻고 물었습니다. 당신, 정말 괜찮은지를. 언제부턴가 나는 당신이 담긴 풍경이 탁하고 희미해져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런데 당신은 정말 괜찮은지를. 함께 걸었던 길에서 이제 당신이 보이지 않는데, 어쩌면 난 이리도 당신의 먼 곳으로 와버렸는데 당신은 그걸 알기나 하는지를.



사랑하는데 왜 아픈 것이냐고 당신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작은 방에서 난 대답하겠습니다.

그건 우리의 사랑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방향을 잃어버린 사랑은 그만큼 잔인하고 그만큼 아픈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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