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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11. 2021

2.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확신

 그날 FM 라디오의 주파수는 교통방송에 맞춰져 있었다. 아니 그랬다고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높게 솟은 도시의 빌딩 사이에서 전파의 방해라도 받는 듯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고르지 못한 소리는 일종의 공기로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잠깐. 공기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눈이 보이지 않는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다면). 만질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분명히 존재하지만 집중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느껴진다. 아니, 느껴진다고 생각된다. 공기는 우주 속 지구라는 행성에 어마어마한 확률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공기를 붙잡아두고 있는 지구의 중력과 대기권 따위의 복잡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우주라는 거대한(사실 고작 거대하단 말로 그 크기를 명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공간에 지구라는 행성에만(아직까지는) 유일한 생명체를 허락하는 그 비효율성의 실현은 결국 공기 덕분이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 확실히 존재했던 그 공기를 가빈이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기억보다는 각인에 가까울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모호성을 동반한다. 그것을 언제 꺼내어 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을 바꾸고, 시선의 높이에 따라 모양을 바꾸곤 한다. 그래서 결국 진실을 감춘다. 하지만 각인은 다르다. 각인은 오히려 침전에 가깝다. 공기처럼 태곳적부터 원래 존재했다는 듯 심장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가 작은 외부 충격에도 다시 부옇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 외에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린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라는 듯. 그 각인 덕분에 가빈이는 그날의 일이 선명한 것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보자. 가빈이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거실의 벽 쪽엔 갈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 고급 이태리 가죽으로 만들어진 꽤 고가의 제품이다. 사용한 시간이 시간인지라 자세히 살펴보면 얇은 실금들이 생겨 가죽을 갈라놓고 있지만 그것 자체로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가격은 상당했지만 결혼 당시 가빈이의 엄마는 고집스럽게 이 소파를 선택했다. 소파에서 풍기는 은은한 가죽 냄새는 그녀가 언젠가 맡았던 파리 뒷골목 낡은 헌책방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었을 때 밀려오는 냄새와 비슷하다. 가빈이의 엄마는 결혼 전 일 때문에 자주 유럽을 오고 갔었다. 유럽의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골동품을 구매하고 그것을 한국의 뷰티크에 재 판매하는 게 가빈이 엄마의 일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그녀는 탁월한 능력 있었다. 일종의 센스랄까. 주인들도 차마 알지 못하는 물건의 숨은 가치를 그녀는 잘 발견했다. 물건의 상태와 외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역사를 조사해서 파악하고 그럴싸한 스토리를 부여했다. 가난한 목수가 자신의 딸의 결혼선물로 직접 만들어준 서랍장이라던지, 몰락한 귀족이 빵 한 조각과 바꾼 의자라던지 기도를 잘 들어주는(미신이겠지만) 성당의 빛바랜 은빛 촛대라던지 뭐 그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물건 자체의 가격보다는 그것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가격을 책정하고 비싼 가격에 팔리게끔 포장하는 능력이 그녀에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여러 지인들은 많이 아쉬워했다. 사실 그녀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그 시장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을 그만두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 인생의 전반전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새로운 후반전이 시작되었다는 듯 단호하게. 

 그 소파에 밑동에 기대어 앉아 가빈이는 얇고 가는 하얀 손가락으로 제법 견고하게 파란색 블록을 집어 갈색 레고 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실의 커다란 창으로는 옅은 햇살이 통과하고 있었고 꽃무늬 모양의 얇은 구멍이 뚫려있던 실크 재질의 하얀 커튼은 거실에 밝은 꽃무늬 햇빛을 흩뿌려 놓았다. 햇살은 가늘었지만 그것의 온기를 충분히 전달할 만큼은 뚜렷하고 확실했다. 가빈이는 그런 햇살의 온기를 느끼며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들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건 자동차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어떤 것은 선명하고 또 어떤 것은 뿌옇기만 하다. 그러니까 가빈이는 그날 라디오에서 교통방송이 흘러나왔다는 것엔 확신이 있지만 자신이 만든 것이 자동차였는지는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시간의 뒤편으로 흘러가버리면 그때부터 기억의 주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선명한 것에는 확신을, 희미한 것엔 모호함을 더할 뿐이다. 흘러가버린 그것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말라버린 빈 소라껍데기에서 바다의 파도 소리를 뒤쫓는 것처럼 조금은 허망해지고 만다.


 강변 북로의 북단, 동작대교에서 반포대교 방향에 화물트럭 한 대가 고장이 나 멈춰 버리는 바람에 도로 위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라고 꽤나 걱정스러운 말투로 라디오 DJ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다음 곡으로는 The Doors의 <Light My Fire>을 선곡했다(물론 당시 가빈이는 The Doors는 물론이고 그들의 노래도 알지 못했다). 교통방송에서 선곡하기 The Doors의 <Light My Fire> 다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래가 흘러나왔고 그때 가빈이는 여섯 살이었다. 역시나 여섯 살 여자 아이가 듣기엔 The Doors의 노래는 뭐랄까, 조금 앞서간 느낌이다. 거실에서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던 가빈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 중 화물트럭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가 모는 그랜져 차보다 상당히 크고 네모난 차. 그 외 강변북로니 반포대교니 따위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가빈이는 잠시 블록을 손에 쥔 채 부엌의 엄마를 바라봤다. 가빈이가 바라본 그녀의 뒷모습은 항상 정갈했다. 작가별로 정리해 놓은 책장에 꽂혀있는 가지런한 책처럼. 그러니까 있어야 할 것들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하지만 반대로 그것엔 작은 것 하나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길한 불안감도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커다란 건물을 해체할 때 몇 군데의 기둥에 다이너마이트를 심고 폭발시키면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고작 몇 개의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전체가 말이다.


 가빈이의 엄마는 라디오를 들으며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된장찌개에 들어갈 감자와 애호박과 두부를 깍둑썰기로 가지런히 잘라 놓았다. 가빈이가 먹기에도 좋게 너무 크지 않은 크기로. 그리고 가빈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서 계란 세 개를 꺼냈다. 아침에 사놓은 신선한 계란이다. 식자재를 선택하는 부분에 있어선 그녀는 꽤 까다로웠다. 그건 이 주부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날 먹을 음식의 식자재는 그날 장을 보는 것. 냉장고는 가능한 가득 채우지 않는 것. 화학조미료는 사용하지 않을 것. 음식의 양은 한 끼의 분량만 그때그때 할 것 등. 남편은 종종 음식의 간이 너무 약하다며 투덜대곤 했지만 말 뿐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 그녀는 확고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조금은 천천히 하지만 신중히 단어를 골라 말하곤 했다. 이건 내 영역이에요,라고. "그러니까 이 부분에 있어선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소리군. 그렇지?" 남편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여자들을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니까."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여자들은 원래 그래요. 나만 유별난 게 아니에요.”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겠지." 남편이 음식을 입에 넣은 채 대답했고 대화는 자주 그렇게 마무리가 되곤 했다.

 마지막으로 프라이팬에 구울 소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놓는 것으로 준비는 대충 마무리된다. 반찬들은 작은 반찬통에 담겨 냉장고에 있으니 마지막으로 접시에 옮겨 담으면 된다. 이런 순서는 이제 그녀에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이 기억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원테이크로 매끄럽게 촬영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지만 오늘은 남편이 늦겠구나, 생각하며 그 일련의 과정의 속도를 잠시 늦췄다. 그녀의 남편은 퇴근길 강변북로를 이용한다. 교통방송의 디제이 말처럼 지금 그녀의 남편은 강변북로 한가운데에서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리게 자동차의 바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가용을 이용해 출퇴근을 한다는 건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이용한다면 더더욱. 그것은(그러니까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이용한 서울에서의 출퇴근은) 그것 자체로 꽤나 괴팍하고 성가시지만 단단하게 존재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커다랗고 무거운 의지를 얹어 커다란 벽을 세워 놓는다. 그러니까 쉽사리 누구도 그것에 저항하지 못한다.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숙명처럼 포기해야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공기와는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과,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걸 알고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힘이 들까? 일반적으론 기다리는 쪽이 더 수월할 것이다. 기다리는 쪽은 그 출발점에 가만히 서있으면 된다. 서 있는 그곳은 바로 달려오는 쪽의 목적지일 테니까. 대신 믿음이 필요하다. 반드시 기다리는 사람이 온다는 믿음. 스스로 그 자리에 머물기만 한다면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지금은 홀로 서있지만 결국 그들을 만나게 한다. 하지만 그 출발점 위의 가빈이 엄마는 뭔가 모르게 마음이 조급했다. 믿음이 없는 것일까. 믿음과 불안함 사이에 잠시 깊은 우물에 빠진 것처럼 부엌에 낸 작은 창으로 하늘 바라 볼뿐이었다. 그리곤 안정을 되찾겠다는 듯 거실에서 놀고 있는 가빈이를 살펴봤다. 반대로 꽉 막힌 길 위에서 초조하게 시간의 젠 걸음을 바라만 봐야 하는 가빈이의 아빠는 오히려 그 시간 여유롭게 The Doors의 <Light My Fire>을 들으며 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강변북로가 막히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충분히 예상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가빈이의 아버지는 조금 무딘 편이었다. 여유의 본질을 몸에 가득히 부여잡고 있었다. 기다리는 자의 불안함과 다가가는 자의 여우. 가빈이의 집은 무언가 반대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온당한 감정의 몫이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정처 없이 표류했다. 그 표류의 감촉은 집 안 정경의 색깔을 바꾸곤 했다. 가빈이 엄마의 정갈한 뒷모습에 희미하게 달라붙어 있던 불안감은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흐름을 고작 여섯 살인 가빈이는 알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블록을 하나하나 쌓으면서 아빠를 기다릴 뿐.


 가빈이의 엄마는 허리 뒤로 손을 돌려 앞치마를 풀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했다. 앞치마를 식탁의 등받이에 걸쳐 놓고는 부엌의 서랍장에서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따듯한 차 한잔은 지금의 불안을 조금은 덜어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시간을 좋아했다. 부엌의 식탁에 앉아 따듯한 차를 한 잔 마시면서(그녀는 주로 루이보스티 차를 마신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가빈이를 지켜보는 것. 지켜보지만 개입하지는 않는 것. 이상하게도 가빈이는 그녀가 직접(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낳은 딸이지만 그녀는 가빈이와 살을 맞대는 것이 어색했다. 가빈이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하나의 개별화된 객체로 가빈이를 바라볼 때가 그녀에겐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가빈이에게 모유수유를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 가빈이를 낳은 후 젖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도 명확한 원인을 알지는 못했다. 그저 심리적인 문제라며 그녀에게 정신과 상담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일이면 젖이 나오겠지, 다음 날이면 가빈이를 안고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물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었다.  사실 젖이 나오지 않은 그녀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가빈이 쪽도 문제였다. 가빈이는 전혀 엄마의 젖을 물려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 계속 울어대면서도 비록 나오지 않은 젖이지만 엄마의 젖꼭지는 물지 않았다. 그녀도 가빈이도 서로의 동물적인 본능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시간을 그렇게 흘러 가빈이는 모유수유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이유식을 먹는 시기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가빈이는 이유식은 잘 먹었다. 그렇게 가빈이와 엄마는 불안이 잠식한 집에서 본능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분 짓고 그곳에서 서로의 반대편을 바라만 봤다.

 가빈이의 엄마는 잠시 그런 예전의 일을 생각하며 그래도 건강하게 자라준 가빈이를 새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물이 다 끓었다는 주전자의 삐익 소리 때문에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녀는 백화점에서 조금 비싸게 주고 구입한 수입(영국산) 찻잔에 루이보스티 티백을 뜯어 넣었다. 좋은 향이 그녀 주위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찻잔에 물을 따르기 전 조용히 눈을 감고 그 향기를 음미했다. 마른 찻잎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풀내음과 조금은 향긋하고 날카로운 과일향이 그녀의 코를 통해 몸으로 스며들도록. 그리고 그 향기가 알 수 없는 불안을 몰아내 주길 바라면서.

 그녀는 가스레인지에서 주전자를 들고는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잠시 거실로 고개를 내밀고 가빈이를 들여다보았다. 항상 얌전히 노는 아이라 별다른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시선 안에 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주전자에서는 뜨거운 흰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블록을 가지고 놀던 가빈이는 엄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부엌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순간 가빈이와 엄마는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가빈이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엄마,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블록을 가지고 놀기를. 하지만 가빈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 또한 거두지 않았다. 전혀. 가빈이는 계속해서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적은 두껍고 확실하게 공간에 쌓여가고 있었다. 사고 조차 그것에 묵여 함께 굳어갔다. 순간 공기조차 그 운행을 멈춘 것 같았다. 시간과 공간의 왜곡. 그 왜곡이 그녀들을 공간에 가두었고 그녀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임도 사고도 모두 제압당한 채. 하지만 그 왜곡의 작은 틈 사이로 분명히 무언가 오고 갔다,라고 그녀들은 느끼고 있었다.


 순간 두 여자를 채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가빈이를 보며 그녀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주위의 모든 것은 분명 현실이었다. 그녀의 집, 그녀의 부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준비하는 저녁 식사. 그녀 자신까지도. 하지만 그날, 평평하고 조금은 지루하게 그녀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던 현실이라는 공간이 이질적으로 구겨졌다. 혹시 꿈은 아닐까? 그녀는 누군가 옆에서 그녀의 몸을 건드려주길 바랐다. 그리고는 모든 게 꿈이었다고. 조금은 이상했지?라고 말해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The Doors의 <Light My Fire>는 끝이 났다. 조금은 들뜬듯한 목소리로 DJ는 내일 날씨에 대해 조잘거리고 있었다. 시답잖은 소리였지만 그녀는 라디오 소리에 집중해보려 노력했다. 그것이 이 기묘한 상황의 유일한 탈출구가 된다면 절실하게 힘주어 잡고 싶었다. 하지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가빈이의 시선이 그녀를 계속해서 묶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날 바라봐. 이게 진실이니까. 가빈의 눈빛은 마치 정언명령이라도 되는 듯 강하고 집요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건 가빈이도 마찬가지였다. 가빈이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블록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것 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가빈이의 몸이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듯 뇌의 신경은 손 끝에 가 닿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는 축축한 늪에 빠져버린 듯 의지에 힘을 더할수록 자꾸만 수렁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결국 그 순간 그녀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상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봤다. 가빈이는 엄마의 눈에서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엄마는 가빈이의 눈에서 주전자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 같았다. 눈에서 시작해서 코와 잎, 귀를. 그리고 얼굴의 전체 모습 속에서 그것들의 균형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그렇게 자신의 얼굴의 그림자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확인하겠다는 듯 그녀들은 서로를 세심하게 확인했다.

 굳어버린 정적은 한순간 지속되었고 두 여인은 하나로 묶였다. 두 사람의 공간을 구분 짓던 벽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얇은 실선의 금은 조금씩 영역을 확장했다. 가빈이도 엄마도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몸을 계속해서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벽의 균열의 조금씩 벽을 허무는 것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고통이나 불쾌감을 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자신을 빠져나와 상대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출산의 그것이 가빈이와 엄마의 물리적인 분리였다면 이번엔 반대로 정신적인 묶임 같은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라고 간신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가빈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각인되었을 뿐이다.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무언가가 엄마에게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엄마에게로부터 온 무언가가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 그래서 둘이 하나로 묶였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것에 어떤 저항을 할 수 없었다는 것도.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어진 것이다. 가빈이와 그녀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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