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날이었다.
이제는 정말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누가 선언이라도 하듯 거짓말처럼 날이 추워졌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추운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나는 종종 추위가 오면 당혹스럽다. 나에게 추위는 차라리 통증에 가깝다. 불편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날아와 단단히 박히는 선명한 통증. 이건 여름의 더위와는 또 다르다. 분명히.
아무리 막아내려 해도 추위는 기민하고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제 몫을 꼭 받아내겠다 다짐한 지독한 사채업자처럼 내 주변을 서성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조금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정당하게(그의 입장에선) 추위라는 생체기를 나에게 남긴다.
시베리아에서 몰려왔다는 차갑고 싸늘한 공기 덩어리가 당분간 한반도를 뒤덮고 있을 거라고(그래서 정말 한동안 정말 추울 거라고) 예쁜 기상캐스터가 웃으며 말했다. TV를 보고 있자니 기상캐스터라는 직업도 참 쉽지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화창한 날씨엔 당연하겠지만 궂은 날씨예보에도 얼굴을 찡그리면 안 되니 말이다. 어쨌든 예쁜 기상캐스터가 웃으며 소개한 그 차갑고 싸늘한 공기덩어리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강하게 스크럼을 짜고서는 꽤나 질기게 한반도의 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것 봐. 기상캐스터도 우리를 웃으며 반기고 있잖아, 라는 이상한 착각을 하며 말이다.
차라리 눈이라도 실컷 뿌리고는 꺼져버리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출근길에 나섰다. 그리고 역시나 싸늘한 공기가 나를 파고들었다. 거리 위 사람들의 옷차림은 잘 갈린 칼날 같은 시린 바람을 한가닥이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두껍고 치밀했다. 어떤 이는 옛 중세시대 장군처럼 온몸을 갑옷으로(물론 진짜 갑옷이 아닌 여러 겹의 두꺼운 옷으로) 무장하고는 말 그대로 눈만 내놓은 채 거리를 재빠르게 해쳐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추위에 대항해서 각자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옷 안,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다. 혼자 그 진짜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추운 겨울 거리를 걷는 유일한 재미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소소한 즐거움을 허락할 만큼 걸음이 느리지 않다. 앞을 보고 빠르고 정확하고 추운 바람처럼 날카롭게 나를 스쳐 지나간다.
언젠가 계절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일 년에 한 바퀴씩 쉬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이건 분명 대단한 일이니 일단 지구에게 칭찬을 건넨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자전축이 약 23.4도 기울어져있고, 그로 인한 태양의 고도 변화(우리나라 입장에서)에 따른 태양에너지 양의 변화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말고 말 그대로 계절의 변화 말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 기온의 변화를 각각의 이름을 가진 사계절로 잘라 구분했을까. 그 구분의 기준선은 어디이며 또 누가 정했을까. 만약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이 이 혼자 살아간다면 계절의 구분이 의미는 있을까, 정도의 시시껄렁한 생각들.
내가 계절을 파악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거리 위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는 것이다. 몇몇은 계절을 앞서간 옷차림을 또 몇몇은 계절에 뒤쳐진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난 대략 그 두 그룹의 평균에 맞추고 있다. 쉽게 말해 니트나 카디건을 걸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슬슬 가을 옷을 꺼내어 입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물리적으로 구분되는 계절의 변화가 아니었다. 계절에 따라 덩달아 변해버리는 감정이 문제다. 내 감정의 축이 지구의 자전축처럼 기울어져있기라도 하듯이 계절을 따라 내 감정은 요동쳤다. 게다가 징크스일지도 모르겠지만 봄과 여름에는 대체적으로 기분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고 가을과 겨울엔 좀처럼 쉽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히 겨울엔 더욱더 말이다. 그것이 계절의 문제인지 아니면 내 감정의 문제인지 확실치 않았으므로 계절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내 감정의 축이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그리고 그건 역시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12월의 첫날, 겨울의 초입에서 난 왠지 모르는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린 바람과 함께 반갑지 않은 어떤 사건이 지척에서 몸을 숨긴 채 날 겨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출근길엔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고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휑한 시린 바람과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뿐.
생각해보니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것도 겨울이었고, 나는 더 이상 네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엄마가 떠나버린 것도 겨울이었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것도 겨울이었고,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떠난 것도 일 년 전 겨울이었다. 그러니 내가 겨울을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꺼리는 까닭은 당연했다. 누군가에게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은 유독 나에겐 더욱 가혹했었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다가왔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나는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정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일 년 전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던 그녀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희뿌연 연기처럼 실체가 없는 공기에 가까워졌다. 그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두서없이 이어지는 의문과는 다르게 자신의 순서를 역행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꾸준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흘러갔다. 그 꾸준함 속에서 난 의문의 시작과 끝 모두를 놓아주고 이제는 결론 따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녀가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분명히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니 숱한 의문이 만들어낸 깊은 호수 가운데 그녀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만 오롯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엔 옳고 그름이 없다. 자연현상에 의문을 갖는 것이 건방진 것처럼 선명한 사실을 부정하는 건 억지에 가깝다. 다만 조금의 아쉬움이 있을 뿐. 명백한 사실과 풀리지 않는 의문 사이에 나는 선명한 줄을 그었다. 그리고 시간의 순서에 따라 조용히 풀리지 않은 의문에서 명백한 사실 쪽으로 내 발을 옮긴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 가 "있었다"로 바뀐 것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에 여전히 굳건히 존재했고(아마도), 내 세상에서 그녀가 사라진 것뿐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므로 홀로 품고 있던 의문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건조하게 말하면 난 결국 그녀의 부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안정기에 접어든 것이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니 대략 삼 개월쯤 전부터 말이다.
그 전의 구 개월의 시간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들을 붙잡아두려는 안간힘과 그냥 될 대로 되라지 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풀어두었던 방임의 시간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날도 있었고, 영구 운동을 반복하는 시계추처럼 영원의 시간에 갇힌 것 마냥 시간의 알갱이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날도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시간을 방탕하게 소비하기도 했고,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한 시간의 벗이 되기도 했다.
찾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 그녀인 줄 알았는데 공기였던 것이다. 영원히 실체를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공기. 크기를 키우기도 하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그 커다란 공기덩어리 안에서 그것들을 가늠하는 내 모든 기준은 모호해졌다. 애초에 공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선명한 실체에서 희미한 공기로 변해버린 것뿐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꼬박 구 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 정도면 싸게 값을 치른 것일 수도. 난 그렇게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공기 덩이라만큼 차가웠던 그녀라는 공기덩어리에서 구 개월 만에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지나고 나서 바라보니 파도는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잔잔했던 바다였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의 한가운데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던 당시 내 인생은 기본적으로 줄이 끊긴 부표처럼 망망대해를 방향 없이 떠다녔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