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전호 Jan 12. 2022

좀 더 먹고 가요

살면서 만나는 여러 사람 중엔 만남의 끝에 반짝이는 느낌을 건네주는 이들이 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있을지 약속을 건넬 수 없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닐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 태도와 눈빛에 그것들을 담아 건네는 사람. 사는 게 바빠 내가 당신을 잊어버릴지라도 문득 한 번을 떠올릴 것 같고 그리고 당신도 언젠가 그랬으면 조금스럽게 바라게 되는 사람 말이다.



추운 겨울의 여행을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채비를 하는 나에게 조지아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당신인 것은 참 다행이었다. 여섯 개의 침대가 놓인 허름한 도미토리의 방을 우리 둘은 나눠 썼다. 나는 당신보다 하루 먼저 왔다는 이유로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침대를, 당신은 커다란 공용 테이블 앞에 있는 가운데 침대를. 그리고 비어있는 네 개의 침대 공간은 우리의 공용 생활 장소였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나는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건네는 말소리는 들리지만 늦은 밤 조용히 내뱉는 혼잣말은 들리지 않는 거리.

한 사람의 온기를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 따듯한 거리.

등을 돌린 당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감정은 느껴지는 거리.


어떤 사람은 여행지에 만난 인연과의 거리를 꽤나 잘 유지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헤어졌을 때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한 거리.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 거리 유지에 실패하기도 한다. 너무나 가까워진 인연과의 헤어짐으로 남은 여행에서 외로움을 곱절로 느끼는가 하면 애초에 곁에 아무 인연도 두려 하지 않아 고독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정답이야 없겠지만 난 항상 중간이고 싶었다. 스쳤던 인연을 아예 없었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단단한 마음도 내겐 없었고, 지나간 인연들을 쌓아두고는 그것에 현재를 겹쳐 조금은 덜 안녕하게 지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당신과도 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말이다.



대학생이었던 당신은 겨울방학 중 문을 닫는 기숙사에 머물 수가 없어 커다란 짐을 싸들고는 이곳에 왔다. 이삿짐이라기엔 초라하고, 여행 가방이라고 하기엔 커다란. 당신의 짐들의 대부분은 책들이었다. 공부를 꽤나 열심히 하는 대학생이구나, 생각했다. 언젠가의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여행자였지만 좀처럼 밖에 나가질 않는 나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의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며 공부를 하던 당신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공유했다.

여행지가 아닌 삶의 공간에서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숙소에 머무는 기분은 어떨까? 평소보다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될까, 아니면 이곳에서조차 그저 일상의 오늘과 내일이 습관처럼 이어지는 기분일까.


이곳과는 먼 나라의 사람인 당신이 조지아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건 분명 사연이 있을 것이다. 방학이지만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당신에겐 아마도 아픈 사연. 방학이 시작되고 저마다 짐을 챙겨 가족에게 돌아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잠시 지내야 할 곳을 찾아야 했던 마음은 지금의 날씨보다 더 추웠겠지.


나는 당신이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숙소의 비좁은 부엌에서 허술한 재료로 만들어온 파스타를 나에게 같이 먹자고 했다. 혼자 먹기에 부족한 저녁식사였을 텐데.  다정하고 외로운 마음이다. 아마 부족한 식사로 배가 고픈 것보다 내가 떠나면 혼나 남게   안의 차가운 공기가  견디기 어려웠겠지. 당신이 마음이 가여워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기도 했다.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하는 나에게 당신이 말했다.


"좀 더 먹고 가요."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당신의 마지막 말이 자꾸 생각나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스치는 인연을 담아둘 마음이 나에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낭을 채우는 건 물건이 아니라 인연이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일까. 이런 모순된 마음을 당신에게 알려주고 돌아설 걸 그랬다. 당신의 마음이 조금은 데워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다 올 걸.


그곳에 우리가 있었다. 자그마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역할, 각자 다른 온도로.

차마 다 받아내지 못한 따듯했던 마음이 종종 생각나 나는 자주 그리워한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이름이 지나간 자리에 피어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