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림과 선지, 버들물굽이와 순주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by 온형근

(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제림과 선지, 버들물굽이와 순주


둑방을 걸으며 의림지의 시경(詩境)을 읽는다.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고대 수리(水利) 시설의 기억에서 ‘제천 의림지와 제림’이라는 국가 명승의 이름을 지닌다(2006년). 의림지의 가치를 농업관개시설의 산업 분류에서 제방을 따라 펼쳐진 숲 ‘제림(堤林)’과 어우러진 빼어난 문화경관으로 재평가하는 뚜렷한 전환점이다. 물의 효용 가치와 숲이 자아내는 미학 가치와 결합한다. 의림지는 비로소 온전한 조경헤리티지로 거듭난다. 의림지가 자연과 인간의 오랜 대화를 통해 하나의 완결된 예술작품, 즉 ‘호반원림(湖畔園林)’으로 승화되었는지를 탐색한다. 옛사람이 남긴 제영시와 기문을 통해, 호수와 숲이라는 두 요소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총체적 경관을 이루었는지 살핀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둑방04.png 나는 둑방 걷기를 좋아한다. 그 푹신한 느낌이 좋아 ‘둑방길’이라 표상하며 즐겨 찾는다.(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나는 둑방 걷기를 좋아한다. 그 푹신한 느낌이 좋아 ‘둑방길’이라 표상하며 즐겨 찾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감촉 밀고 들어오는 그 관능, 그때마다 제방을 쌓은 공력과 발효된 세월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감지한다. 특별한 경험은 오래 남는다고 했다. 걸어서 의림지로 소풍 가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의림지 둑방을 걷기만 했을까. 뛰고 춤추고 놀던 원체험을 지녔다. 아버지의 젊은 모습이 사진으로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제천(堤川)은 냇둑이라는 말이다. 제천의 옛 지명인 내토(奈吐)로 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둑방의 개념이 빠진 적 없다. 이 오롯한 사실이 의림지가 안겨주는 장소성의 진실이다. '제천(堤川)', '의림(義林)' 이 두 단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말의 진원지를 두리번 찾게 한다. 내게는 꽤나 위력있는 말이다.

의림-캘리.jpg 연구소에 비치된 의림-月白 作 (2020.03.02.)

사실 의림지의 초기 명칭은 ‘숲속의 저수지’라는 뜻을 지닌 ‘임지(林池)’이다. 이 이름은 의림지가 제천의 진산인 용두산 자락에 자리하여, 태고부터 울창한 숲과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음을 명확히 시사한다. 이후 고려 성종 10년(991)에 제천에 ‘의천(義川)’과 ‘의원(義原)’이라는 별호가 내려지면서, 이 지역의 상징과도 같았던 ‘임지’에 접두어 ‘의(義)’가 결합되어 ‘의림지’라는 이름이 탄생된다. 의림은 둑방에 심은 오래된 소나무 숲이다. 저수지 둑방을 의롭게 지키며 호수로서의 풍경을 완성한다. 그래서 의림지의 풍광을 임호(林湖)라고도 부른다. 의림이라고 써서 연구소 한켠에 두고 자주 쳐다본다. 그렇다. 나는 제천 사람이다. 제천과 의림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 깊은 무의식의 심연 어딘가가 울렁거리고 심박수 빨라진다.


살면서 내 동네, 내 고향을 일찍 떠나와 성장하다 보니 되돌아볼 틈 없이 분주하다. 아름차고 고탑지근할 때마다 하던 일을 접고 다녀오고픈 격랑이 인다. 엊그제 디스크 협착으로 입원하였는데, 제천과 의림지가 떠올라 고질병처럼 갈급한 갈망이 돋아났다. 입원의 긴긴밤을 새우다시피 의림지의 누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읽었다. 의림지의 누정을 만나러 아니갈 수 없게끔 들뜬다. 지금 시도하고 있는 취재 현장 답사를 통한 ‘한국정원문화콘텐츠’의 재발견을 ‘의림지 누정 원림’으로 택정한다.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의 취재 답사 대상지로서의 제천이 발바닥의 용천혈을 타고 온몸을 휘돈다. 꼭 만나러 가자는 약속을 손바닥 노궁혈을 세게 누르면서 긋는다. 그래서 제천이고 의림지이다. 만사를 제치고 나선다. 그 속에 들어가 소통하며 추체험으로 몸소 확인하고 관계맺기에 스며들 참이다.


시인과 묵객이 거닐던 호반원림


17~18세기 제천에 연고를 둔 남인계 일군의 멋진 인물 네 명과 만난다. 창랑 김봉지, 송파 이서우, 연초재 오상렴, 학고 김이만이 그들이다. 창랑 김봉지(1649~1713)는 ‘제천16경’을 의림지의 시경으로 처음 제시한다. 이어 송파 이서우(1633~1709)는 이를 계승하여 오언절구 연작시로 시경을 전파한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필연이다. 송파 이서우의 제자인 연초재 오상렴(1680~1707)은 ‘창랑옹모산별업16경소지’에서 시경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학고 김이만(1683~1758)은 <임호부>와 <산사> ‘의림지’조에서 의림지 시경의 틀을 변모시키고 격조를 북돋운다.

이들이 구축한 의림지 호반원림의 세계는 생산과 풍류가 하나로 어우러진 독창적인 공간이다. 담장을 두르지 않고 제천의 산과 들 전체를 정원으로 삼는다. ‘무경무애(無境無碍)’의 경관 미학이 서려 있다.

김봉지와 이서우, 오상렴과 김이만이 의림지를 걷는다. 의림지에서 체화하여 건져 낸 시와 풍경의 고급스러운 운치에 이끌린다. 제천에서 태어난 김봉지의 ‘제천16경’은 일실되었으나 이서우의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을 통해 재현된 대상 경물을 순서대로 호명한다. 조선시대 원림의 특성을 잇는 경관 해석에 등장하는 ‘16경’은 전국 경승지 곳곳에서 출현하고 경영되었다.


“진섭헌(振屧軒), 의림지(義林池), 우륵당(于勒堂), 연자암(燕子巖), 대송정(大松亭), 호월정(湖月亭), 대제(大堤), 선지(銑池), 폭포(瀑布), 용담(龍潭), 홍류동 (紅流洞), 자연대(紫煙臺), 유만(柳灣), 순주(蓴洲), 내교(內郊), 외교(外郊).”


-이서우, 『송파집』권10, 「시」,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 한국고전종합DB


이와같이 ‘16경’은 김봉지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원림 경영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 ‘진섭헌 별서’이다. 김봉지는 ‘의림지 제방을 쌓느라 나막신에 묻은 진흙을 털어 놓아 만들어진 봉우리’인 ‘신떨이봉-한자로는 진섭산(振屧山)’에 ‘진섭헌(振屧軒)’을 건립하여 거점공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후선각(侯仙閣)을 지었다. 진섭헌은 김이만의 『학고집』에서 “선지(鐥池)의 서쪽 산기슭의 비탈진 고개 위에 진섭헌이 있으니, 바로 김씨의 별서”라고 하였다.

선지는 의림지의 찬 물을 잠시 가두었다 내보낸다. 못물의 온도를 조절하여 무논에 관개하는 현명한 조치이다. 김이만의 『학고집』에 선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승국(勝國)의 말엽에 이르러 다시금 진흙이 물을 가득 메웠다. 조선의 정(鄭) 하동(河東) 인지(麟趾)가 호서·영남·관동 지역의 3로(路)를 몸소 살피면서, 그 장정들을 조율하여 의림지를 준설하여 치수하도록 하였다. 의림지 남쪽에 큰 제방을 축조케 하였으나, 수문을 설치하지는 않았고,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끔 하였다. 그 아래에 작은 연못이 물길을 받게 하여, 저수와 배수를 적절하게 조절하였으니, 이름하여 이르기를, ‘선지(鐥池)’라 하였다.


-김이만, 『학고집』권9, 「잡저」, <산사-의림지>, 한국고전종합DB .


이 기록은 15세기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도입한 과학적인 수리 체계를 보여준다. 의림지 본 못(親池)과 보조 못(子池)을 연동하는 ‘친지-자지형 수리체계(Parent-Child Reservoir System)’를 통해, 용두산의 차가운 계곡물을 선지에 잠시 가두어 햇볕에 데운 뒤(축설의 원리) 농경지로 내보내는 생태적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승국은 고려를 말한다. 의림지는 고려말 매몰에 가깝도록 진흙으로 가득찼다. 그러니 못을 파 낼 때, 나막신에 묻은 진흙을 떨어낸 게 산을 이룰만하다. 둑을 막은 큰 제방(대제, 大堤)의 아래에 선지가 있고, 그 서쪽 진섭산 기슭 비탈진 고개에 진섭헌 별서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조선초 정인지가 못물을 완전히 빼서 준설과 치수공사(준치, 浚治)를 할 때 의림지의 물을 받아 저수와 배수(축설, 蓄洩)를 조절하는 이중 수리 체계를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의림지에서 나누는 대화를 상상하다


17~18세기 의림지를 배경으로 송파(松坡) 이서우(李瑞雨, 1633~?)와 학고(鶴皐) 김이만(金履萬, 1683~1758)이 만난다. 둘은 50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 물론 가상의 만남이다. 둘 다 제천에 연고를 둔 남인 지식인이다. 이서우가 의림지의 미학적 기초를 ‘제천 16경’으로 세웠다면, 김이만은 구체적인 서사와 생활사를 입혀 의림지 담론을 완성한 관계에 주목한다. 어느 늦은 봄날의 해질 무렵 의림지 둑방길에서 소나무 숲을 거닌다.


(노송이 우거진 제방 길을 이서우가 뒷짐을 지고 걸어가고, 청년 김이만이 그 뒤를 따른다. 바람에 소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서우:(호수를 바라보며) 여보게 학고(김이만의 호), 내가 이곳 의림지를 거닐며 ‘제천 16경’을 읊조린 것은 이곳이 하늘이 내린 ‘영경(靈境, 신령스러운 경치)’이기 때문일세. 저기 버드나무가 우거진 물굽이(유만)를 보게. 낚싯배가 드나드는 모습이 마치 그림 같지 않은가?

김이만:(고개를 끄덕이며) 예, 선생님. 선생님께서 김봉지 어른의 뜻을 이어 ‘16경’ 시를 지으신 덕분에 의림지는 비로소 풍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방을 걸을 때면 풍경 너머의 땀방울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서우: 땀방울이라?

김이만: 예. 이 거대한 제방은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만들었다는 ‘진섭헌(신털이봉)’의 전설처럼 수많은 사람의 노고로 쌓인 것입니다. 흙만 쌓은 것이 아니라 소나무와 버드나무 뿌리가 흙을 단단히 잡도록 하여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저 늙은 소나무 숲은 풍경이면서 치수(治水)를 위한 지혜이지요.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신털이봉.jpg 신털이봉, 진섭헌이 있던 자리를 표식하였다. (2023.10.23.)


(두 사람은 제방 아래 작은 보조 연못인 ‘선지’ 앞에 멈춰 선다.)


이서우: 자네는 역시 이곳 토박이라 보는 눈이 깊군. 내 시(詩)가 경치를 노래했다면, 자네의 글은 그 안의 이치를 파고드는구려.

김이만: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혹시 정인지 대감께서 이곳을 수축하실 때 만드셨다는 이 ‘선지’의 묘미를 아시는지요? 의림지의 물은 용두산 계곡에서 내려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이 찬물을 바로 논으로 보내면 벼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곳 ‘선지’에 물을 잠시 가두어 햇볕에 데운 뒤 내보내는 것이지요.

이서우: 허허, 그렇군. 나는 그저 맑은 물이라 좋아했더니, 그것이 백성을 먹여 살리는 ‘따뜻한 생명수’가 되는 과정이었네그려. 자네가 기록한 『의림지기문』에 그 내용이 상세히 담겨 후대에 전해질 걸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정자, 대송정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호수 한가운데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김이만: 선생님, 저 호수 깊은 곳에 이무기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서우: 이무기? 그저 물고기와 자라나 많은 줄 알았는데.

김이만: 옛날, 사람들을 괴롭히던 거대한 이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씨 성을 가진 다섯 장사가 나타나 이곳 대송정에서 활을 쏘아 그 이무기를 잡았지요. 그때 흘린 피가 의림지를 붉게 물들였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어장사참사가(魚壯士斬蛇歌)」라는 시로 엮어보았습니다.

이서우: (무릎을 치며) 통쾌하구나! 나의 16경이 정적인 풍광을 그렸다면, 자네는 그 속에 역동적인 서사를 불어넣었어. 자네 덕분에 의림지는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백성들의 애환과 용기가 서린 전설의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네.


(둑방 끝,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서우: (폭포 소리에 목소리를 높이며) 보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같지 않은가! 나는 이 폭포(9경)와 아래 용담(10경)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했네.

김이만: 맞습니다. 이 물줄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 아래 청전 뜰 수천 경(頃)의 논을 적시는 생명줄이 됩니다. 선생님과 제가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만, 결국 의림지는 ‘생산과 풍류’가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호지(湖池)’입니다.

이서우: 그렇네. 나는 시(詩)로 길을 열었고, 자네는 기록(史)과 이야기(說)로 그 길을 넓혔으니, 후대 사람들은 우리 둘을 통해 의림지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야.


의림지 둑방을 걷는다. 걷는 동안 몸은 저절로 움직였는지 경치에 이끌렸는지 분별없다. 다만 마시고 내쉬는 숨결을 느끼며 고요하게 걷고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시경으로 원림을 경영하던 그들의 세월은 거짓말처럼 흘렀다.


용추폭포에서 서성대며 사방을 살핀다


나는 지금 의림지 용추폭포에 멈췄다. 사실 의림지 누정 원림에서 가장 우월한 풍광을 안겨주는 곳이기에 발길이 멈출 수밖에 없다. 절벽으로 곧추 떨어지는 물줄기는 돋아난 단차의 암벽에 떨어질 때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새로 지어진 홍류정은 2층 루(樓)처럼 되어 올라가지 않으면 저수지 수리시설처럼 보인다.

막상 새로 건립한 홍류정에 올라가면 제2의림지인 비룡담 쪽으로 시선이 트였다. 용두산은 둘러싸인 백 개의 골로 산 전체가 울록불록 잘 다스린 근육이다. 왜 신월동 사람들이 백골산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비룡담 동쪽 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골짜기를 바투잡아 오르면 직선거리로 구석기 시대 유적인 점말동굴이 자리한다. 이곳을 용굴이라 부른다. 신라의 화랑이 명산대첩을 찾아 호연지기를 기를 때 의림지에서 점말동굴로 이어졌다. 그들의 이름이 동굴 암벽에 각자로 새겨져 있다. 점말동굴은 화랑이 유오(遊娛)하기에 더없이 좋은 경관이다.

다시 용추폭포로 돌아온다. 하얀 포말이 저녁녘 노을을 만나 붉은 포말이 된다. 그래서 홍류폭이다. 지금 누로 지어진 홍류정은 용담 아래에서 홍류동을 바라보는 지점에 있었다. 용추폭포의 장관에 깊이 빠져가며 홍류정 누계단을 내려본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연자암에서 순주2.png 연자암에서 바라본 순주의 모습, 수심이 꽤 갚어졌음을 알 수 있다. (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6경 중 하나인 순주(蓴洲)이다. 1696년(숙종 22년) 현감 홍중우(洪重禹, 1661~1726)는 수심과 물의 맑기를 측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림지 북동쪽 모퉁이에 ‘순주’라는 작은 인공섬을 축조한다. 김이만은 그의 시 「추회(秋懷)」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노라니 맑고 얕은 정도가 순주에 기록된다”라고 읊으며 이 섬의 기능을 기록으로 남긴다. 인공섬인 순주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 그리고 임금님께 진상하던 순채가 어우러진 정원이다. 섬이 물에 잠기는 정도를 보며 수심과 수질을 측정하던 조선시대의 ‘생태적 수위계’인 셈이다.

의림지의 풍경이 지금과 비슷하게 완성된 이 즈음의 1698년(숙종 24년)은 단종 복위와 사육신·충신의 복권된다. 숙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을 복위시키고, 생육신과 사육신 등 충절을 지킨 인물들을 대거 포상한다. 제천 인근 원주와 영월을 오가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던 관란(觀瀾) 원호(元昊, ?~?)가 이 시기에 표창을 받고, 원주의 운곡서원 등에 제향된다. 이는 제천 인근 선비들에게 ‘충절’과 ‘의리’라는 가치를 다시금 고취하는 계기가 된다. 의림지를 찾는 제천 지역 사대부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용추폭포 유리바닥은 오래되어 탁하다. 탁한 시선을 외면하고 발돋음하여 보호책 위로 아래를 내려본다. 선명한 물결 튀는 현애의 절벽으로 물안개 깊게 피어오른다. 저 아래 홍류정지에서 올려보는 앙경의 용추폭포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김이만은 ‘무릉교’라 불렀다. 김이만은 홍류정(紅流亭)을 더러 ‘홍류각, 호정(湖亭), 위정(危亭)’ 등과 같은 시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후진각임소정 소나무.png 후선각/임소터의 소나무(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저 아득하고 깊게 파인 양안의 산줄기는 하나같이 우쭐하게 올라있어 점점 멀어지는 풍경을 읊을 수 있는 자연의 대를 가진다. 지금의 활터 자리가 그러한 위치 속성을 가졌다. 여기 건물 하나는 이미 이곳의 승경을 알고 지은 근대기 이전부터 자리하여 오늘까지 경제 행위를 이어왔을테다. 용추폭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직선으로 내려보는 게 아닌 사선으로 비스듬히 보는 각도가 필요하다. 무릉교 오른쪽 활터 자리가 그중 하나이고 경호루 못 미처 축대 자리가 또 하나이다. 이 자리가 김봉지의 후선각(侯仙閣) 터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우람하고 장하여 그 활력과 생김새를 따라잡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이다. 후선각 정자의 현판은 의림지 방향으로 임소정(臨沼亭), 용추폭포 방향으로 후선각으로 걸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감으로 내려다보면 과연 용추폭포의 전모가 한꺼번에 밝혀진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후선각터.png 후선각/임소정 터(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쉼없이 포말 일렁이며 떨어진다. 크고 작은 포말은 끊임없이 부딪히며 부서지고 사라진다. 그 위를 또 다시 왁자하게 쏟아내며 떨어진다. 일렁이고 흩어진다. 무너지고 쪼개진다. 없어지는 게 아니다. 새로운 운동에너지에 의해 새로운 물줄기가 뭉친다. 사라진 물줄기인가 새 것의 물줄기인가를 똑똑히 부릅뜨고 쳐다봐야 한다. 야바위에게 눈 부라리며 대들었다가 털린 눈초리와는 격을 달리하는 바라봄이다. 시간이 어찌 지나는지 알 수 없다. 폭포의 소리가 귀에 더 크게 들린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도록 포말에 잠겨 든다. 그 안에 내가 어깨 춤을 춘다. 포말이 만든 무대로 세상이 버거운 많은 이들이 함께 어울린다. 저절로 일어나는 통쾌한 흥취에 이끌린다.


겨울 의림지와 누정


내 첫 번째 시집인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에 실린 「아버지」라는 시에 의림지 누정이 나온다. 2002년 발간되었으니 20년 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창작은 그보다 오래전이었겠다. 1_산책, 2_노을, 3_친구, 4_입하의 4편의 연시이다. 그중 1편의 산책에서 영호정을 지나 경호루를 거치면서 용추폭포를 지나고 유만(柳灣, 버들물굽이)의 의림지 둑방을 걷는 풍광이 그려진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용추폭포.png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의 용추폭포 전경(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아버지

온형근




1. 산책


...


어느 귀퉁이에 혼자 놀다

퇴근 길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따뜻한 허리를 껴안고

내가 한없이 행복해 할 때쯤

당신은 나를 안아 내린 채

소나무 숲 의림지 둑방을 걸었지요

영호정에 오르고 경호루에 걸터앉기도 했어요

너른 품속에 안겼던

볼은 따갑고 숨이 막혀

아무리 밀어내도 미동도 없었지요

당신은 허허대며 웃었지만

정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가슴속에 나는

작은 새가 되어

소나무 숲 의림지 하늘로 날고 싶었지요

너무 잊고 살아

꿈길에 당신과 걸었습니다.

...


(「아버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68~72, 다층, 2002.10.28.)


지금은 의림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산책로를 개설하였지만 그때는 주로 의림지 남쪽 둑방에서 서쪽 둑방만 걸을 수 있었다. 오래된 노송이 즐비하여 감탄의 탄식이 절로 나는 풍경은 주로 이곳에서 완성한다. 임호(林湖)의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인데 함께 걷던 아버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걷는 게 기쁨이니 몸은 껍질이 아니고 영혼으로 가득찬다. 디딘 양발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혼이 어슬렁거렸고 나는 어느새 그 따스했던 겨울 의림지를 자꾸 떠올린다. 차안(此岸)에서 떠오르고 잦아들고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스며듦의 배역이겠지만 순순히 받아들인다.


제천 의림지 호반원림 - 연자암에서 순주.png 의림지 우륵정, 우륵대, 연자암, 멀리 순주섬이 보인다.(2023.02.20. 촬영실사, AI 화풍 리터칭)

현재 의림지 누정 원림에는 영호정(映湖亭), 경호루(鏡湖樓), 홍류정, 우륵정(于勒亭)이 있다. 입증 가능한 누정 경영의 기록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복원하지 않았다는 게 특징이다. 의림지 누정 원림의 점진적인 제 모습 찾기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우선, 진섭헌 별서를 중심 거점 공간으로 복원한다. 이를 중심으로 호월정, 홍류정을 영건한다. 용추폭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후선각과 폭포소리를 듣는 청폭정을 제 위치에 짓고 연지암이 마주보이는 곳에 대송정을 복원한다. 우륵당도 도로공사 이후의 산자락에 위치시키고 특히 야외무대로 사용하고 있는 유만을 물굽이처럼 처리하여 왕벚나무 대신 버드나무로 교체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림지의 생태적 연결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용두산에서 의림지를 거쳐 솔방죽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생태학적 지대를 형성한다. 이 유기적 관계망이야말로 의림지의 역사적 진정성을 보장하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호시탐탐 추진되는 대규모 개발 계획은 의림지 고유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연결고리를 끊어낼 심각한 위험을 지닌다. 물과 숲,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이야기와 생태가 끊어지지 않도록 잇는 것이 문화유산의 보전이다. 훼손된 제림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외지에서 다 자란 소나무를 이식하는 방식은 근시안적인 처방이다. 탐방객의 답압 문제 해결의 세심한 관리 방안도 요구된다. 인간의 향유와 자연의 보전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에 의림지 호반원림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러한 하드웨어적 복원은 시간과 예산을 요구한다. 그러니 최소한 의림지 누정 원림이 자리했던 터에 문화유산 해설판이라도 정성스럽게 설치하여 장소성을 고양한다. 이왕이면 오래된 사진이나 그림을 포함하여 품격있는 안내 표지여야 한다. 복원은 그 다음 천천히 격조있게 추진하면 될 일이다. 문화유산이 있었던 ‘유지(遺址)’를 정성 다하여 조사하여 표지판을 설치한다. 이를 찾아다니며 걸을 수 있는 동선을 완비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할 때 의림지 누정 원림의 복원은 ‘지성감천’의 현실적 동력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 믿는다.

① 진섭헌 ② 의림지 ③ 우륵당 ④ 연자암 ⑤ 대송정 ⑥ 호월정 ⑦ 대제 ⑧ 선지 ⑨ 폭포 ⑩ 용담 ⑪ 홍류동 ⑫ 자연대 ⑬ 유만 ⑭ 순주 ⑮ 내교(안뜰) ⑯ 외교(청전뜰)

온형근(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시인·조경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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