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노란 손수건
알람 소리에 일어나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전날 그렇게 먹고 마셔댔는데 뭘 바란단 말인가. 수영이는 행복한 꿈을 꾸는지, 마루바닥에서 연신 웃으면서 자고 있다. 냉장고에 “나 일 있어서 나간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잠자코 있어”라고 써 붙여두고 대충 챙기고 나섰다. 하필 오늘 조조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이다. 차라리 오후에 만나자고 할걸. 그러면 얼굴 붓기라도 좀 빠진 다음에 만날 수 있었을텐데. 뭐,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포기한 인생이다. 지난 번에 그 난리를 치고도 다시 만나자고 해준 희균 씨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거나 외계인이 분명했지만, 나는 그 행운을 잡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가 보기로 한 영화는 SF물이었다. 외계 행성에 사는 생물체들의 이야기. 그것도 3D. 영화관에서 나눠준 안경을 쓰고 보고 있는데,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깜깜한 우주 장면이 펼쳐지는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둑이 터지듯이 펑 하고 눈물이 흐르더니, 나중엔 꺼이꺼이 소리마저 새어나왔다.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희균 씨가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내게 슬쩍 무언가를 건넸다. 손수건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요즘 시대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다 있나? 가지런히 접힌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안경 밑으로 눈물을 닦았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꾸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루루 입구를 향해 몰려갈 즈음, 희균 씨가 아직 자리에 앉은 채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아무 일도.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저도 사실 좀 슬프긴 했어요. 저 넒은 우주 속에 우리는 그저 먼지같은 존재일 뿐인데, 뭘 그리 아등바등하고 사나 싶고… 우리 인간들이 참 한심하죠?”
“맞아요. 인간들이 너무 한심해요. 저는 더 한심하고요.”
“음… 제가 너무 선 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만금님은 그 버릇 고치셔야겠어요. 스스로 자꾸 한심하다고 하는 거요. 맨날 죄송하다고 하고.”
“그쵸? 정말 제가 너무 한심하죠? 맨날 한심하다고나 하고. 죄송하다고나 하고.”
“이것 봐요. 또 한심하다고 하잖아요.”
“그러네요…”
“우리, 나가서 밥이나 먹어요.”
화장실에 가서 보니, 몸은 퉁퉁하지, 얼굴은 풍선같지, 게다가 울어서 눈까지 빨간 모양새가 나야말로 바로 SF에서 방금 튀어나온 외계인 같았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그가 전해준 손수건이 연노랑빛에 모서리마다 꽃모양 수가 놓여져 있다. 뭐야, 이 사람. 이런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단 말이야?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영이가 안쓰러웠던 걸까. 아니면 희균 씨 말마따나, 거대한 우주 공간을 맞닥뜨려 보니 우리 인간들이 한심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던 걸까. 내 인생이 그냥 서러웠던 걸까. 그래도 왠지 희균 씨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 사람을 그의 손수건만큼이나 곱게 기억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영화관 건물에 있는 샤브샤브 집에서 식사를 했다. 무한리필 집이었다. 카운터에 있던 넉살좋은 사장이 나를 흘낏 보더니, “오늘 고기 좋습니다. 마음껏 드세요!”라고 방긋 웃는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분 나빴을텐데, 오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 없다 싶었다.
사실 뚱뚱한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점이다. 나는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밖에 먹지 않고, 무한리필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다이어트 중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 집은 히노끼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찜통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서 먹는 신기한 요리법을 취하고 있어서인지, 꽤 흥미로왔다. 고기는 사장의 말과 달리 보통 수준이었다. 희균 씨는 부지런히 왔다갔다 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이 먹었지만,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는 듯했다. 야채 중에서도 땅 위에서 나는 푸른색 풀들. 사람이 한껏 울고 나면, 무언가를 고요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눈물이 우리의 마음창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때문이겠지. 희균 씨의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간만에 잔잔하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기분 나빴죠?”
“언제요?”
“아까 사장이 만금님에게 고기 좋다고, 마음껏 먹으라고 그랬잖아요.”
“뭐, 그런 말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매너 없었어요. 사실 먹기는 내가 더 많이 먹는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잖아요.”
“그러네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네요.”
“그런데, 손수건은 왜 가지고 다니세요?”
“아, 손수건요? 너무 노인네같죠? 제가 땀이 잘 나서 어머니가 꼭 챙겨주세요.”
“어머니랑 같이 사세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가끔 오셔서 집 정리 해주시거든요. 손수건을 꼭 가지고 다니라고, 가져다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다음에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행복한 만남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수영이 깨어있었다. 내가 밥을 먹고 왔다고 하니 심통이 난 듯했다. 나름 나랑 같이 먹으려고 김치찌개에 양배추찜에, 멸치땅콩볶음에,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알아서 잘도 챙겨 놓았다. 오자 마자, 일요일 아침부터 누구를 만나러 나갔냐고 다그친다.
“남자”
“뭐? 남자라고? 누군데?”
“누구라고 하면, 니가 알아?”
“어떻게 만났는데?”
“소개팅 앱”
“아이고, 너 그 남자들 다 왜 소개팅 앱에 들어오는 건지 알긴 알아?”
“왜 들어오는데?”
“그러니까 니가 바보소릴 듣는 거야. 이 언니가 누구 만나게 되면 미리 보고하라고 했지?”
“뭔 소리야?”
“너 진짜 몰라서 그래? 그 남자들 다 여자랑 한 번 자보겠다고 그러는 거야. 다른 목적 하나도 없어.”
“희균 씨는 안 그래.”
“뭐? 희균 씨? 희균 씨가 누구야? 니가 오늘 만난 남자? 얘가 완전히 빠졌군.”
“몰라. 나중에 이야기해. 나 졸려.”
희균 씨도 나를 그저 살덩어리, 섹스파트너로 보는 걸까? 아니, 뚱뚱한 사람은 따뜻함을 느낄 권리도 없는 걸까?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을 계속 파고 들기에는 너무 졸렸다. 수영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난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내게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