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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라 Apr 21. 2021

버드나무처럼

부여에서 만난 봄볕과 버드나무, 그리고 우리 가족의 오늘.


나는 이제 아빠 엄마에 대한 모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마치 남얘기하듯 심드렁하게 자신의 어깨수술 얘기를 하는 아빠의 낮은 목소리 저만치 뒤에서 어깨수술을 하고나서 재활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이전처럼 일을 하지는 못할 거라는 그런 불안이 그냥, 난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아빠 내가 내줄께, 병원비. 단숨에 말하고 싶었지만 서른이 훌쩍넘은 내 나이의 숫자 앞에서도 영 나아지지 않은 주머니 사정이 먼저 앞서 눈 앞을 지나가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제일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1년이 넘도록 사라지기는 커녕 여전히 기세등등한 채 활보하고 있는 망할 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면회도 갈 수 없어, 돌아가는 상황을 병원에 입원한 아빠 입을 통해 (그것도 자초지종 내가 물어가며)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 수술을 하는 의사선생님도 좀 보고, 전신마취를 한다던데, 3시간이나 걸린다던데, 그런 사정들도... 의사선생님, 간호사선생님한테 직접 듣고, 무엇보다 어떤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 아빠의 얼굴도 직접 보고싶은데. 답답한 슬픔이 몰려왔다.



4월 둘째주 주말, 봄볕이 따뜻했던 부여의 궁남지.

그날의 한갓진 풍경은 마음에 오래 남을 것이다.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우리 가족은 마스크에 습기가 차도록 수다를 떨며 풍경 속을 거닐었다. 평화로운 그 풍경의 8할은 잔잔한 연못 옆을 따라 드리운 버드나무였다. 젊은 아빠가 어린아이가 탄 그네를 살살 달래며 밀어주고 잡아주듯, 따뜻한 봄바람이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들을 흔들었다.



4월의 이파리들은 아직 진한 초록으로 영글기 전의 연한 노랑연두빛이다. 연해보이기만 하는 수많은 이파리들이 버드나무의 얇은 가지들을 따라 촘촘이 나있고 가까이 가서 보면 의외로 숱이 많고 키가 크며 가지는 질겨보였다. 아빠는 외국종이 아닌 토종 버드나무라고 했다. 슬로모션을 걸어논듯 느린 속도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살랑살랑. 소리없이 잔잔한 연못 위에서 찬찬히 그네를 탄다.


연두빛 이파리와 파란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잔잔한 연못. 버드나무가 알려주는 봄바람의 형(形)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두고 있자니, 마음이 고요해지며 그동안 품고있던 부모님에 대한 모진 마음들만 동동 떠올랐고, 그 못난 것들을 이제 버리고 싶었다.


흔들- 흔들-,  나풀- 나풀-

예기치못한 일들로 때론 흔들리고 넘어져도 어쨌든 저쨌든 살아가고 있는 나.

여전히 엄마손을 잡고, 아빠 팔짱을 끼며 걷고. 아빠가, 또는 엄마가 등을 밀어주고 그네 줄을 잡아주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잘나서 아빠는 이거 나에게 못해줬고, 저거 나에게 못해줬고, 엄마는 이런 말로 나에게 상처를 줬고... 그런 모진 기억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깊은 호수바닥 속에 살고 있는 괴물인건지, 때때로 불쑥 머리통을 쳐들어 거친 파도를 일으킨다.


원망의 말만 주저리대며 나는 그럼 그동안 무얼 했나.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며 윗세대에게 책임을 묻는 신조어 따위들을 겉으로는 경계하면서도 내심 깊은 속에서는 더한 생각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남모르게 품은 흙빛의 생각은 날이 선 말로 두분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을 수도.


아빠의 어깨가 닳을 동안, 엄마의 무릎이 닳을 동안,  나는 얼마나..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얼마나 열심히 했나. 여름날은 누구보다 더 덥게, 겨울날은 누구보다 더 춥게 일하실 동안, 나는 에어컨바람에 감기가 걸리고, 걸핏하면 체를 하고, 히터바람에도 몸살에 떨면서 나는 무얼 얼마나 한 것인가. 자신의 어깨무릎보다 내 감기와 약한 위장의 안부가 걱정이던 두분의 마음은, 냉장고 깊숙히 넣어논 생강청, 매실청, 대추청, 우슬환 투박한 병들에 그대로 담겨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보려다 눈물이 곧장 나고 마음 한구석이 쓰려서 더 생각을 하지못했다.

상처투성이 사랑투성이. 상처와 사랑이 뒤엉킨 거대한 시간을 다시 곱씹어 생각해본다는 건 버드나무 이파리 한장한장 세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었다. 마음에게 지독한 일이다. 난 그냥 투정을 부리는 세살배기 딸이었다. 늙어가는 두분에게서 아직도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서른훌쩍 넘은 애송이. 철없는 어린아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철부지 어린 마음에 원망으로 버무려진 모진 마음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다. 뭣이 중한거냐고, 지금은 나보다 연약해보이는, 세상에서 나와 가장 깊게 연결된, 중년의 남자가 외롭게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뭣이 중한디. 이제 그런 감정들은 미세먼지에 불과한 것들일 뿐.


아빠, 아빠가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려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안좋고...무겁고...어쩌구저쩌구.

수술 전날저녁 아빠에게 전화해 재잘재잘 말해본다.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고 그 주변만 맴맴 돌고돈다. 내가 아빠의 불안을 읽은 것처럼 나의 미안함과 복잡한 어떤 그 마음들을 들여다보고 있겠지.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깊은 호수바닥의 괴물은 떠났다. 궁남지에서 맞이한 봄볕같은 새 감정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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