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어려운 초록
이 글은 수많은 식물들을 무관심속에 죽이고 쓰는 반성의 일기다.
내 키만했던 알로카시아, 드라코, 야자... 그리고 고사리, 휘카스, 고무나무, 담쟁이, 립살리스... 내 손을 거쳐간 많은 초록들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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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관심이 부족해'
내 손에만 들어오면 식물이 죽는다는 나의 한탄을 잠자코 듣고있던 동생이 내뱉은 한마디.
동생의 이 한 문장이 내 심장에 날아들어왔다. 맞다. 나는 관심이 부족하다. 그러니 정성을 들인 일도 없다. 내가 데려온 식물의 이름과 물주는 주기 정도만 슥 보고 지나쳤는데, 내가 훑어본 정보는 비슷비슷한듯 했다. '일주일에 2-3회(또는 1-2회) 주세요' 하지만, 그대로 따라 물을 줬다간 과습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기 일쑤였고, 어떤 식물을 검색하든 그게그거인 설명같았다.
식물을 주구장창 사며 얼굴을 익힌 식물상점 사장님은 (너무 자주 온다싶은)내게 손가락 두마디쯤 넣어보고 흙이 말라있으면 물을 흠뻑 주고, 통풍이 중요하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 뒤로 틈틈이 흙 속을 점검했다. 10센티쯤 넣었다 빼서 촉촉하게 흙이 묻어나오면 그대로 두고, 바삭하게 건조된 것 같으면 물을 흠뻑 주었다. 그렇게 하고나니 얼마간은 새 잎도 보고 데려올 때보다 제법 키가 커진 모습도 보았다. 문득문득 그런 발견을 할 때마다 기분좋은 성취감을 느꼈다.
그래, 내가 잘 하고 있구나! 힘내보자, 초록아!
그렇게 자신에 차 있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중 어느 평화로운 아침, 드라코의 목이 댕강 부러져 달랑 거리고 있던, 참담한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뒤통수를 쎄게 맞은 듯 충격에 휩싸여 이미 부러진 드라코의 머리를 손에 받치고 줄기 위에 다시 얹어보기도 하고 안절부절하다가 줄기보다 얇아지고 물렁한 목대가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드라코의 풍성한 머리를 받치고 서있기엔 얇아진 목대가 힘이 없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과습인걸까...? 과습 노이로제에 걸린 나는 인터넷을 찾다, 드라코 목대 가까이에 있는 잎들을 인위적으로 떼면 목대가 얇아질 수 있으니 처진 잎들을 가위로 적당히 잘라주어야했음을 깨달았다.
드라코는 아래쪽 잎사귀들을 처지게 하여 내게 무수한 신호를 보냈었지만, 이 몰상식한 주인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미관상의 이유로 잎을 떼내며 지나가 버렸다. 그 동안 드라코는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튼튼히 잘 자라고 있던 알로카시아는 겨울에 위기를 맞았다. 이 무심한 주인이 겨울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물을 주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에 자신의 두툼한 겨울외투와 난방에만 신경을 썼지, 그에 따른 알로카시아의 변화는 물주기 텀만 좀 늘렸을 뿐이었다.
결국 겨울의 중간쯤 밑둥에 큰 상처가 났고, 상처는 점점 깊어져 힘을 받지 못해 허리가 꼬부랑, 굽어버렸다. 부러지기 일보직전이라 아예 잘라내서 다시 심어주는 게 좋다고 하여 몇시간 동안 낑낑대며 다른 화분에 옮겨심었다. 이렇게 해도 곧 죽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서툰 솜씨로 이사를 마쳤다. 서툴디 서툰 나의 손짓을 탓하고 있자니 드라코를 비롯한 크고작은 식물들의 죽음이 스쳐지나갔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알로카시아는 이해심과 참을성이 많았다. 전과가 많은 이 주인을 용서한듯 (아니 한번은 봐준 것 같다) 새 화분에서 자리를 잘 잡아주었다. 여전히 허리는 구부정하여 벽에 기대어 생명을 연장 중이지만, 또 내가 알아채지 못한 몸살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일단은 새파란 잎을 뽐내며 살아주었다.
동기가 죄책감이든 무엇이든 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또 이렇게 살아주니 고맙고 또 고마워 정이 들었다. 제일 먼저 걱정되고 신경쓰이는 친구가 되었다.
임이랑 작가님의 [아무튼, 식물]을 읽으며 물주기 3년 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본격적으로 화분을 들인 것부터 생각해보자면 이제 나는 3년을 곧 채워가고, 이 섬세하고도 강인한 초록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되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내가 돌봄에 대해 얼마나 대충인지, 무심한지, 또 나 자신만 생각하는 욕심많은 사람인지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 데려온 식물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성을 들일 생각은 못하고, 그들이 알아서 잘, 이 곳에 적응하겟지- 하며 적당히 모르는 척, 방치해둔 나다. 시들해진 초록 앞에서 냉정하고 차가운 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그날그날의 날씨에 조금은 예민하게 반응해본다. 내 몸 위에 겉옷 하나 더 걸칠 때 내 곁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본다. 그 동안 수많은 초록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나의 귀한 습관이다. 이렇게라도 성장했으니 조금은 그들의 희생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식물들을 돌보며 동시에 그들에게 돌봄을 받는다. 하루 1시간씩 산책을 챙겨주고 있는 나의 까만 강아지는 산책하는 동안 나를 햇빛을 쐬게하고 걷게 한다. 여인초에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며 돌볼동안, 여인초는 내게 싱그러운 공기와 에너지를 주며 나를 돌본다. 나의 주변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이 초록들에게서 돌봄을 배우고 있다.
지난 겨울은 내게 혹독했다. 코로나 규제로 인해 안그래도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던 중 들이닥친 한파로 인해 운영하는 가게의 수도와 난방은 말썽을 부렸다. 힘이 들고 추위가 무서웠다. 가게로 출근하는 날이면 썰렁한 공간에 숨쉬는 생명은 식물들과 나 뿐이었다. 그저 이들과같이 언젠가 봄은 올꺼라는 자연의 섭리에 기대어 버텨보자는 생각 뿐,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아보이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봄날, 지독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함께 견딘 나의 알로카시아, 나와 가장 많은 겨울을 보낸 여인초, 언제나 해맑은 자태의 몬스테라, 그리고 립살리스, 박쥐란... 내게 쉽지 않은 겨울이었던 만큼 그들도 그랬다. 따뜻해진 햇볕을 쬐일 수 있게 이리저리 화분을 움직여본다. 함께 겨울을 버텨주어서 수고했다고, 나를 돌봐줘서 고맙다고도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