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급식실 들어가서 손 씻고 알코올과 종이타월을 들고 기계처럼 급식차 쪽으로 향했는데, 니시가타상이 오늘은 야채 써는 걸 좀 부탁한다고 하더라고. (일본에선 뭐 시킬 때 부탁한다고 함) 그리고는 파랑 앞치마랑 도마, 칼을 꺼내 줬어. 아, 파랑 앞치마? 식재료를 만질 때나 조리 중엔 파랑 앞치마를 해야 되거든. 육류 어패류를 만질 때는 빨강 앞치마고, 달걀은 노랑, 알레르기는 초록, 배식이나 식기를 만질 때는 하늘색, 설거지나 정리할 땐 남색 앞치마를 해야 해. 지금까지 하늘색이랑 남색만 해봤는데, 와우! 드디어 파랑 앞치마. ㅋ
두근두근 치프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목장갑을 왼손에 낀 다음에 커다란 도마에 날이 잘 선 칼을 들긴 들었는데… 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칼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주부 10년 차에 단호박 한 번 안 잘라봤겠어? 근데 정말 처음 자르는 것처럼 긴장되더라고. 오늘 메뉴가 단호박 참깨 조림이니까 조림용 자르기는 또 매뉴얼이 있겠지 싶어서 일단 치프 자르는 거 쳐다봤지. 커다란 소쿠리에 4분의 1로 다듬어진 단호박들이 잔뜩 담겨 있고 치프는 딱딱한 단호박을 무슨 두부 썰 듯 툭툭 썰어 젖히더라. 게다가 크기도 고르고 이쁜 네모란 말이지. 이게 진정 프로의 모습이구나. 얼~~
마스크 뒤에 벌어진 입을 다물고 용기를 내서 어떻게 자르면 되냐고 물었어.
치프의 친절한 설명.
“4분의 1로 잘려있는 단호박을 삼등분하고 그걸 다시 4-5등분 정도로 잘라주시면 돼요."
“네~"
일단 단호박 하나를 가져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써는데 칼이 쑥 들어가. 칼이 어찌나 잘 들던지 집에서 쓰던 무딘 칼질하고는 차원이 달라서 무섭더라고. 나름 정확하게 삼등분을 해서 그걸 다섯 조각 정도로 썰었어. 모양은 비슷하게 나왔는데 속도가 너무 느린 거야. 힝~ 빨리 썰자니 칼도 무섭고 치프랑 비교되게 들쭉날쭉이고…
그때 치프가 눈치 딱 채고,
"어차피 만들면 다 똑같아요. 대충 하시면 돼요.^^"
ㅋㅋㅋ 어라? 생각보다 치프 느슨한걸? 뭐 처음이라 배려해 준 거겠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웠지. 그 말 듣고도 한동안은 멈칫멈칫 천천히 썰 수밖에 없었어.
그러다가 속도가 붙으니까 쓰윽-탁탁탁! 리듬이 생기더라고.
치프도 써억써억, 탁탁탁!
중간에 온 나카야마 상도 탁탁탁!
나도 열심히 맞춰서 탁탁탁!
한참 정신없이 리듬 타다 보니까 460명 분의 단호박 썰기가 끝이 났어. 단호박의 시원한 냄새가 코끝에 남아서 오늘 저녁은 단호박 요리해볼까? 혼자 생각하면서 칼이랑 도마를 씻으려고 하는데, 으헉! 칼에서 손이 떨어지질 않아. 뭔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보니까 칼을 쥐었던 손에 힘을 너무 줘서 이미 큼지막한 물집이 잡혔던 것 같아.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써는 속도에 맞추는 거만 신경 쓰다가 물집이 터져서 피부가 칼에 떡 붙어버린 거지. 으~~~ 요령 없이 리듬만 타다가 그 지경이 된 거지 뭐. 아직 낯설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얼른 밴드 붙이고 장갑 끼고 겨우겨우 일했다니까. 이 날 벗겨진 피부 때문에 설거지할 때 무지 아팠다!
이상하게 요즘 일하다가 생기는 상처 말고도 집에서 프라이팬에 화상을 입질 않나 긁히질 않나 손에 상처가 많이 생기는 거야. 급식 일도 그렇고 집에서까지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으니 상처가 아물 시간이 있냐 말이지. 내 손이 다치고 보니까 남의 손이 눈에 들어오더라. 조리하는 직원들은 화상 입기도 하고, 건조증이나 습진, 상처 때문에 피부과는 일상이라니 급식 일을 하는 손들이 참... 대단해 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