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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지 Jul 29. 2019

2-18. 빗속으로

날씨와 파도



1.

죽도 서핑 일주일 후.


다시 찾아온 주말은

잔뜩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 정도가 심해

서핑을 주저했지만

'태백산맥 기후'를 믿고

서핑을 떠났다.


날씨가

'이젠 9월'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2.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한다.

간만의 멜랑꼴리 한 날씨를 즐기며

양양을 향하는 길이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다.


한계령휴게소.

영서지방과 반대되는 날씨가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


이제 곧 서핑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도시로부터 벗어나 가장 멀리 왔다는

상징과도 같은 장소.


한계령휴게소에 올랐다면

영서와 영동의 다른 날씨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하는데...

동서를 막론하고

날씨는 험상궂었다.


평소 때엔 그렇게 동서 날씨 차가 심하더니

이 날만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내려다본

동해 방향의 하늘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비구름이 짙은 한계령휴게소/ 2016년 9월/ 출처: 김은지



비구름 속의 휴게소는 멋있어 보였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기분은 암담해졌다.

왜 오늘따라 날씨가 한결같은지...



3.

날씨를 많이 타는 스포츠를 즐기다 보니

서핑을 떠나기 전

늘 날씨 때문에 고민을 해야 했다.

날씨가 좋아도

현지에선 입수금지라던가,

날씨가 나쁘지만

현지에선 파도가 좋다던가 하는 일이

거의 매번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와이키키 해변의 기상정보를 보여주는 윈드파인더 사이트의 캡처 사진/ 2019년 7월 /출처: windfinder.com



물론 당시에 '윈드파인더*'같은 앱을

잘 이용할 줄 모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인 게 아니어서

앱의 유무 상관없이

서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건

늘 하게 되는 루틴 아닌 루틴 중 하나이다.


지금도 서핑 동호회에

꾸준히 올라오는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이번 주말 XX스팟 가려는데 가도 될까요?"

차트를 읽을 줄 몰라서 묻는 경우도 있지만

차트에 뒤통수 맞은 사람이 많기도 하단 뜻이기도 하다.


나도 당시까지만 해도

'파도가 있는 날만 가는 방법'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윈드파인더'와 '서프캠***'을 알게 됐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차트는 당일에도 뒤집어지기도 하며

실시간 웹캠 보고 가도

파도가 그 사이 변한다는 것을 경험하곤

모든 걸 포기하게 됐다.


Q: 이번 주말 XX스팟 가려는데 가도 될까요?
A: 어차피 차트대로 안 나옵니다. 그냥 가세요.


이게 서퍼들의 중론인 듯싶다.

서핑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계속하기 힘들 것이다.

국내처럼 파도 상태가 들쭉날쭉하는 곳에선 특히!


*윈드파인더Wind finder: 보통 '윈파'라고 줄여 부른다. 인터넷 사이트와 스마트폰 앱으로 시간대별로 날씨는 물론 파도 높이, 물때, 풍속 심지어는 대기 지도까지의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 관련 서비스 중에서 서퍼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많이 쓰이는 앱일 것이다. 영문으로 서비스된다. 사이트는 windfinder.com, 앱은 '윈드파인더'로 검색하면 다운 받을 수 있다.

**파도 차트Wave chart: 보통 '차트'라고만 얘기하는데 기상정보에서 제공하는 파도 예보를 뜻한다. 기본적으로 파도 높이가 주된 관심사이다.

***서프캠Surf cam: 보통 '캠'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각 스팟마다 사전 협조가 된 샵 한 군데 이상에 CCTV를 설치하고 인터넷 웹사이트나 앱을 통해 현재 각 스팟 바다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이다. 인기 있는 주요 스폿 위주로 서비스된다. 국내용은 'WSB Farm', 'Good surf'가 대표적이고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중계를 시작한 채널도 있다. 해외 서비스로는 'Surf line' 등이 있다.



비바람 치는 서피비치/ 하조대 해변/ 2016년 9월/ 출처: 김은지



4.

일단 한계령까지 왔으니

서피비치까지는 가기로 했다.


도착하고 보드를 렌털 하러 갔다.

'이 날씨면 하지 말았으면~!'

프런트로 향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 날 

서핑이 가능하다고 했다.

철망 너머로

하얗고 커다란 거품이 보였는데,

비가 이렇게 내리고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정말 하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5.

혼자 서핑을 다니면 좋은 건

친구 핑계로 놀 수 없다는 점이다.

(현지에서 친구 사귀면 예외)


...


일단

열정 서퍼 인척 하며

보드를 렌털비를 치렀다.

그리고 보드를 픽업하러 갔다.



새벽까지의 강풍으로 초토화가 된 시설물, 보드 랙과 보드들/ 하조대 서피비치/ 2016년 9월/ 출처: 김은지



난장판이 된 보드 랙****.


새벽까지의 강풍으로

시설물 부서지고,

보드가 날아가고

난리였다는 직원의 말.


나는 이 말을 들었으면

그냥 쫌 포기할 것이지

다른 사람이 안 말린다고

고집을 부리듯 걷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보드 하나를 집었다.


보드를 들고 서있기 힘든 바람이 불었다.


이런 거친 바람과 파도.

아마 겪어본 적이 없어서

고집을 부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들어가라는 데 큰 일 있겠어?'라는

안일한 생각도 한 몫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켠엔 막연함,

한켠엔 자만함.

양쪽 팔에 그 두 개의 부표를 끼고

바다로 들어갔다.


****보드 랙 Board rack: 보드 보관을 위한 선반, 받침대, 진열대 류.




1. 늦은 연재, 죄송합니다.

2. 다음 글, 2019년 8월 01일(목) 발행 예정.

3. 커버 사진 : 한계령휴게소/ 2016년 9월/ 출처: 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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